[절대적 영적 생활1·②] 후회 없는 삶을 위하여

등록날짜 [ 2018-05-23 15:49:42 ]

썩어 없어질 육신에 연연하지 않고
영혼의 때 위해 신앙생활 하는 것이
영원히 남을 최고의 기업이자 보화

언제 하나님 앞에 서게 될지 누구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내 영적생활 어디쯤 와 있나?’ 날마다 점검하는 삶 살아야




돌아보아야 할 영적생활

2004년 인도네시아에서 약 54만 명의 목숨을 한 번에 앗아간 지진과 해일 쓰나미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런 참사를 내가 당했다면 얼마나 허망하겠습니까? 순식간에 남편을 잃고, 아내를 잃고, 온 가족을 다 잃고 비통함과 시름에 빠져 얼마나 통곡했을까요? 만약에 그 지진과 해일을 막아 낼 능력이 있었다면 한 사람도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아 낼 능력이 없어서 많은 사람이 죽었고, 또 지진과 해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에 불시에 그런 천재지변을 당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도 실로암 망대가 무너지는 비슷한 상황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사람이 죽었는데 너희에게는 그럴 가망성이 없는 줄 아느냐, 너희들도 언제든지 그렇게 죽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살아 있는 동안 잘 살아야 하고, 더 가치 있는 일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가 누가복음 16장에 나옵니다. 부자는 이 땅에서 호의호식하고 호화로이 연락(宴樂)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세상에서 잘되는 재미, 호화로이 사는 재미, 연락하는 재미에 빠져서 자기 영혼 망하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결국 육체가 끝난 다음에 지옥에 가서야 자신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살았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 내가 세상에서 호의호식하고 향락을 누리며 쾌락 속에서 육신의 소원과 정욕의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살았던 날들이 축복이 아니었구나! 육신이 행복했기 때문에 축복인 줄 알았는데 내 영혼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어리석게 살았구나!’

부자가 아무리 후회해도 다시는 그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을 아버지라 부르는 선민이었지만, 그것으로 지옥 신세를 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부자가 음부에서 고통을 받으며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합니다. 나사로의 손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케 하소서”라며 절규했지만 조금도 위로받지 못했습니다. 육신이 끝나면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자들, 곧 하나님을 믿지 않은 자들은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됩니다.

부자는 음부의 불꽃 가운데에서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땅에서 “주여, 주여!” 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영혼의 때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내 영적생활이 어디쯤인지, 어떻게 하고 있는지 고민해야 하고, 항상 돌아보며 살아야 됩니다. 이것에 예민해야 합니다. 영원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기억될 영적생활
목회자세미나에 참석하셨던 80대 원로 목사님의 모습이 잊히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목회를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으시고는 “내 인생의 때가 다 지났으니 어쩌면 좋을까? 이제 더는 기회가 없으니 어쩌면 좋으냐?”라고 통곡하셨습니다.

아직 인생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만큼 절실하지 않습니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낙엽이 굴러가듯이 세월을 함부로 낭비하고 삽니다. 육신의 정욕과 세상의 요구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저는 성도들을 보면서 ‘왜 신앙생활에 마음을 쏟지 않고 한눈파는 것일까? 신앙생활에 전념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며 걱정할 때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목사는 목사이기 때문에 당연히 신앙생활에 마음을 쏟는 것이지 어떻게 평신도가 그렇게까지 하겠느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목사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전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 이전에 신앙인으로서 신앙생활이 최고의 기업이요 보화인 줄 알고, 그것이 인생의 전부인 줄 알기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묘지에 가서 무덤을 파 보면 뼈다귀만 남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모릅니다. 기독교인은 이처럼 썩어 없어질 육신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영적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소자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냉수 한 그릇만 떠 주어도 하늘에서 그 상을 잃지 않는다고 했습니다(마10:42). 우리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사건을 연출하는 연출자이자,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시나리오 속에서 아름다운 일을 해내는, 주님 안에서 최고의 탤런트가 되어야 합니다.

요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예인을 너무나 좋아합니다. 하지만 배우가 아무리 예쁘고 연기를 잘해도 진짜를 가진 우리는 가짜를 보고 그렇게 좋아할 필요가 없습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영화가 아무리 감동적이라 해도 그것은 각본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내 죄를 회개하는 것은 진짜입니다. 주의 일 때문에, 이웃 영혼 때문에 울고 감사하고 충성하고 전도하는 모든 일은 단 한 가지도 가짜가 없습니다. 영원히 기억될 실제 사건들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면류관과 함께 영원히 기억될 진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시간은 하나님 나라의 것을 소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기회를 허무하게 다 놓쳐 버린다면 나중에 닥칠 후회를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내 영혼의 때를 위해 사는 것, 이것이 내 목숨보다 큰 것을 위해 사는 것이요, 세월보다 더 큰 가치를 위해 사는 영적생활입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575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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