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 영적 생활1·⑦] 신앙생활 파괴하는 마귀의 궤계를 이겨라

등록날짜 [ 2018-06-25 10:21:21 ]


신앙생활은 마귀와 하는 생각 싸움
아무리 합리적이고 타당해 보여도
신앙생활 물러나게 하는 것이라면
내 영혼 사냥하려는 마귀의 논리니
이를 깨닫고 이길 영적 분별력 갖춰야


마귀는 늘 타당한 논리로 신앙생활 막아
‘이제부터 신앙생활 잘해야지’ 하고도 막상 행동하려면 브레이크가 걸립니다. 그럴 때 ‘힘드니까 다음에 하자, 마음만큼 잘 안 되는구나’라는 브레이크가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세상으로 빠져가는 일에 급브레이크를 밟고, 타락하려고 하는 일에 급브레이크를 밟아야 합니다. 그런데 거꾸로 신앙생활 하는 일에 사사건건 브레이크를 밟습니다. 브레이크를 밟을 때는 항상 타당한 논리가 있습니다. 마귀는 확실하고도 분명한 논리를 가지고 대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연 이것이 내가 신앙생활 하는 일에 방해하는 논리인지 아니면 신앙생활을 돕는 논리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모르고 합리화하면 영적으로 절망입니다. 신앙생활을 못하게 하는 것은 파괴하고 이겨야 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합리화하거나 논리화해서는 안 됩니다.

성도들이 설교한 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목사가 어떻게 제대로 목회를 하겠습니까? 아무리 하자고 해도 하지 않으면 그만두자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저도 충분한 논리를 내세워서 목회를 그만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논리가 소중한 영적 생활을 방해하는 것을 알기에 더 열심히 목회를 합니다.

기독교인의 바른 논리는 늘 신앙생활을 반대하는 마귀를 인식하고 대적하는 것입니다. “네가 반대하기 때문에 나는 한다”가 되어야 합니다. “네가 반대하기 때문에 나는 이겨야 한다, 네가 병들게 하기 때문에 나는 건강해야 한다, 네가 나태하게 만들기 때문에 나는 부지런해야 한다, 네가 기도 못하게 하기 때문에 나는 기도해야 한다, 네가 전도 못하게 하기 때문에 나는 전도해야 한다”라며 신앙생활의 반대자를 이겨야 합니다. 성공하는 사람의 논리와 타락하는 사람의 논리는 이처럼 다릅니다.

한번은 흰돌산수양관에서 진행하는 직분자세미나 때 허리에 복대를 두르고 드러누워서 앓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하도 누워 있어서 기도를 해 주었더니 그 후에는 복대를 풀어서 내던지고 먹던 약까지 강단에 갖다 놓고 반듯하게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성회를 다 마치고 집에 돌아가서 마음이 바뀌었는지 병원에 한번 갔다 와야 하지 않겠느냐며 계속 짜증만 부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상황이 어떻게 변한 줄 아십니까? 이제는 허리가 아니라 허벅지가 아파서 못 움직인다고 합니다. 그리고 약도 도로 가져오라고 해서 먹고 병원에도 다시 다닌다고 합니다. 물론 믿음이 없으면 약도 먹고 병원도 가야 합니다. 그러나 한번 믿음으로 고친 병이니 끝까지 믿음으로 이겨 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와 같이 마귀의 논리는 타당합니다. “몸이 좀 불편한 것 같다. 어째 허리는 안 아픈데 허벅지가 아프냐? 허리는 기도받고 나았지만 허벅지는 다르니까 한번 병원에 가 보자” 하고 설득당한 것입니다. 이 말은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는 이유를 만들어서 우리를 타락하게 만드는 것이 마귀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 놈이 벌써 나를 타락시키려 하는구나!’ 하고 즉각 깨닫고 이겨야 하는데 그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여 마귀에게 당하고 마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성령의 힘으로 죄의 거미줄 빠져나와야
잠자리가 날아가다가 거미줄에 걸렸습니다. 걸리는 순간에 거미가 쏜살같이 달려옵니다. 잠자리가 아무리 “이놈의 거미줄 때문에!”라고 해도 거미줄을 못 보고 걸린 잠자리의 잘못입니다. 만일 거미가 와서 잡아먹기 전에 즉시 누군가 와서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를 떼어내 준다면 살 수 있지만, 거미가 쫓아와서 먹어 버리면 죽습니다.

우리도 죄의 거미줄에 걸리면 안 됩니다. 혹시 걸렸다면 즉시 빠져나와야 합니다. 내 힘으로는 나올 수 없으니 성령의 힘으로 나올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나는 죽는구나. 나는 이러다 죽는구나’ 하고 깨닫고 성령의 도움으로 나와야 합니다. 죽이려는 자가 나를 해하기 전에 이겨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내 신앙을 먹구름처럼 캄캄한 무관심의 늪에 내던지지 말고 ‘큰일 났구나’ 깨닫고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든, 영적 생활이든 내가 잘못하고 있는 타락을 무엇 때문이라고 돌려서 빠져나가거나 위로받으려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마귀역사입니다. 육신의 소욕에서 나오는 생각입니다. 이것을 방관해서는 안 될 적으로 알고 때려 부수면서 살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무엇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기 시작하면 올무에 얽힙니다. 매사가 다 자기 잘못이라고 깨닫는 사람은 즉시 일어날 수 있지만, 무엇 때문이라고 하는 사람은 점점 그 죄의 늪에 빠져들고 맙니다. 세상의 일에 실패했을지라도 ‘아, 나 때문에 실패했구나’ 하는 사람은 성공할 기회가 있습니다. 하지만 남 핑계 대는 사람은 절대 성공하지 못합니다.

마귀는 어떻게 하면 죄짓게 해서 하나님에게서 우리를 끊어 놓고 심판대 앞에 가서 심판받게 할까, 어떻게 하면 우리 육신이 원하는 대로 편안하게 살게 해서 영적 생활을 못하게 할까, 어떻게 하면 우리의 생각을 이용해서 오해하게 만들고 시험 들게 만들까만 궁리합니다. 또 마귀는 적으로 보이지 않으려고 어떻게든 정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마귀는 그 상대에 제한이 없습니다. 예수의 제자인 유다 같은 사람도, 성령이 충만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사람도 그냥 삽시간에 변질시킵니다. 순식간에 짓밟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마귀역사를 신앙생활의 최고의 적으로 알고 보고 싸워 이겨야 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은 전쟁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분량까지 주님 기쁘시게 신앙생활 하려 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마귀역사와의 전쟁입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580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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