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 영적생활1·21] 육신의 정욕과 못된 습관 뿌리째 뽑아 버리라

등록날짜 [ 2018-10-10 16:40:10 ]

“날마다 죽노라” 바울의 고백처럼
쉬지 않고 올라오는 육신의 정욕
기도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려야
참된 신앙생활 영위할 수 있어
신앙생활 반대하는 못된 버릇도
환경·사람 핑계로 덮어 두지 말고
기도로 능력받아 단호히 정리해야

 

날마다 내가 죽는 삶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고 말했습니다. 왜 날마다 죽는다고 했을까요? 이제 내가 죽었나 싶었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눈으로 볼 때 내가 살아나고, 입으로 말할 때 내가 살아나고, 귀로 들을 때 내가 살아납니다. 자기 소욕이 계속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내가 살아나는 그때마다 육신의 소욕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교회 가기 싫거든 스스로 “너는 왜 교회에 가기 싫으냐? 교회에 가기 싫어하는 마음아, 너는 떠나가라”라고 말하십시오. 새벽기도 가야 하는데 일어나기 싫거든 “나는 새벽기도 가야 한다. 가기 싫은 마음아, 너는 죽어라”라고 말하십시오. 그렇게 내 속에서 나오는 신앙생활을 반대하는 수많은 이유를 다 죽여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생활을 하고 싶은 마음만 내 속에서 불타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살아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저도 가만히 보면 저 자신이 잘 안 죽습니다. 누가 나를 욕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그 순간에 ‘아, 정말 아무 잘못 없는 사람을 왜 욕하고 그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다 ‘내가 이러면 안 되지, 주님이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셨지. 맞아. 내가 영적으로 그 사람을 봐야 해’ 하면서 다시 그 사람을 영적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면 ‘혹시 내가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직접 나를 찾아와 대화하면 좋을 텐데 무작정 욕만 해대니 참 안타깝고 불쌍하구나!’라고 생각하며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억울한 누명을 쓰거나, 문제가 생기면 영적으로 보고 해석해서 그 사람을 불쌍하고 안타깝게 여기며 기도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나를 스스로 채찍질하며 돌아본다면 더 성장하게 됩니다. 

누군가 나에게 미운 짓을 하면 기분 나쁘고 속상합니다. 이것은 그 일이 나의 육에 부딪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생각과 환경이 내 육에 와서 부딪치고 내 약점을 건드리는 순간, 육적으로 느껴지는 아픔을 즉시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일이 영적으로 나에게 부딪칠 때는 다릅니다. ‘저 사람이 나를 미워하는 죄를 짓고 있으니 얼마나 불쌍한가!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을 피할 수 없을 텐데 얼마나 불쌍한가?’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사랑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부딪치고 영적으로 볼 수 없으면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이 아가페적인 무제한의 사랑이라는 것은 영적으로만 가능합니다. 이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자신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자신의 자아를 죽이고 영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입니다.

자라기 전에 싹을 잘라라
우리는 각자 못된 버릇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인이 그 못된 버릇을 제일 잘 압니다. 그런데 이 못된 버릇이 신앙생활 할 때마다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러면 ‘이것이 문제를 일으키는 놈이구나’ 깨닫고 못된 버릇을 계속 고쳐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자기의 못된 버릇은 그대로 놔두고 “저쪽에서 나를 건드렸다” “환경만 좋으면 신앙생활 잘할 텐데 환경이 나빠서 그렇다” “그 사람만 가만히 있으면 괜찮을 텐데 그 사람 때문에 그렇다”라고 변명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상당한 오해입니다. 나의 잘못을 덮어 두려는 것뿐입니다.

어떤 사람이 집이 교회와 가까우면 기도를 열심히 할 텐데 멀어서 못 한다고 말합니다. 새벽예배도 집이 멀어서 못 나온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기도도 열심히 하고 새벽예배도 드리겠다고 결심하고 교회 근처로 이사를 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사한 다음 날 새벽예배부터 안 나옵니다. 이사하느라 피곤해서 그렇다고 스스로 위로합니다.

그러나 실제 이 사람이 새벽예배에 못 나온 것은 새벽예배에 안 나오던 습관이 그대로 있기 때문입니다. 집이 멀어서 못 나오고, 가깝다고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아, 내가 핑계였구나. 더는 핑계를 대지 말자. 내일부터는 꼭 새벽예배 드리러 가자’ 하고 마음먹지만 막상 내일이 되면 예전 습관이 또 나를 그대로 지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가 가진 못된 습관의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그 뿌리를 그대로 두고, “뭐 때문이다, 뭐 때문이다”라고 이런저런 이유와 논리를 대는 것은 내 속에 있는 타락의 원인과 잘못된 사건을 이리저리 숨기며, 스스로 타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속에 타락의 자원이 들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꼭꼭 숨어서 “이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당신이 나라면 안 그러겠습니까?”라고 계속 자기 타락의 이유를 변명하고 있으면 내 영적생활을 스스로 망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음부의 권세가 나의 영적생활을 타락하게 할 요소가 내 안에 있는지 찾아야 합니다. 오늘 교회 가기 싫다면 ‘음부의 권세가 나에게 일할 요소가 생겼네’ 하면서 털고 나가야 합니다. ‘그까짓 것 예배 한 번 안 간다고 상관있겠어?’라고 하면 안 됩니다. 발견되면 즉시 해결해야 합니다.

한두 해 정도 자란 어린나무의 나뭇가지를 잡아당기면 쉽게 뚝 부러집니다. 그런데 이 어린나무가 십 년, 이십 년 자라서 커지면 웬만한 힘으로는 그 가지를 부러뜨릴 수 없습니다. 내 속에 자리 잡은 약점과 잘못된 습관도 커지면 쉽게 못 고칩니다. 여린 가지를 딱 잘라 버리듯, 잘못된 습관이 처음 발견될 때 딱 잘라 버려야 합니다. 커지면 못 고칩니다. 그것이 너무 커졌기 때문에 나쁜 습관을 못 고치는 것입니다.

못된 습관은 자기 손으로 고칠 수 없습니다. 이것들을 순간에 고치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능력밖에 없습니다. 내 안에 있는 나태와 게으름 같은 신앙생활을 반대하는 모든 요소가 큰 문제를 만들어 내는 심각한 원수인 줄 알고, 문제가 되는 원수의 싹을 잘라 버려야 합니다. 기도하고 성령 충만해서 옛날의 잘못된 구습을 벗어 버리고 새롭게 출발하십시오. 못된 습관이 나를 망치는 원수라는 사실을 알고 그 원수가 내 영혼을 망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나를 지켜야 합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59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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