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이길 만한 함량
주머니에 돈 만 원이 있는 사람은 식당을 찾을 때, 만 원 이하 메뉴로 맛있게 식사할 수 있는 곳을 찾습니다. 돈 삼천 원을 가진 사람은 삼천 원 이하로 밥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을 찾습니다. 천 원을 가진 사람은 그것으로 배고픔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처럼 자기가 가진 만큼만 생각이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큰 시험이 와도, 그것을 이길 만한 풍부한 자원만 가지고 있으면 간단합니다. 우리는 평생 동안 마귀역사가 수많은 문제와 환경을 놓고 신앙생활을 방해할지라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예수 이름, 하나님 말씀의 자원을 기업으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방해자를 이길 큰 능력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평생 영적생활의 급선무입니다. 목숨을 위협하는 자가 올지라도 그것을 이길 더 큰 함량만 가지면 이겨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큰 함량을 원하지 않습니까? 왜 나에게 얼마나 큰 함량이 있는지 파악해 보지 않습니까? 악한 자를 능히 이길 능력의 함량이 있는지 없는지 왜 점검하지 않습니까? 전투하는 군인이 전쟁터에 나가면서, 총을 몇 자루 가졌는지, 군수물자의 수급량이 얼마나 될 것인가도 모르고 무조건 적진에 뛰어들겠습니까?
우리는 무모하게 신앙생활 해서는 안 되며 충분한 함량을 준비하여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지혜롭게’라는 말이 타협하고 타락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혜롭게 신앙생활 하자는 것은 내 영적생활, 신앙생활의 방해자를 이길 능력의 함량을 준비하자는 것입니다. 무엇이 지혜로운 것인지를 왜 모릅니까? 남모르게 타락하고, 합리적으로 타락하고, 합법적으로 타락하고, 논리적으로 타락하는 것이 지혜입니까? 내가 충성해야 하는데 이럴 수밖에 없는 논리를 내세우고 사람들을 이해시키면서 충성하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까? 할 수 없는 자리에서 능히 할 수 있는 함량을 가지고 나가는 것이 지혜입니다. 능히 신앙생활 할 수 있는 큰 함량을 가지고 신앙생활에 전념하는 자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육신의 요구를 이길 영력
영감이란 영적인 것을 예민하게 느낄 수 있는 영적인 감각을 말하며, 영력은 영적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영적인 힘을 말합니다. 우리가 영감과 영력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적인 감각으로 죄를 분별하기 위해서입니다. 영감 있는 자는 분별력이 있습니다. 영감이 없으면 하나님을 어떻게 알며, ‘나’를 어떻게 알며, 마귀역사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영감이 있어야 그 감각으로 예민하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런 영적인 감각이 없다면 하나님 뜻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곤충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가진 몸의 감각기관들은 생존과 직결됩니다. 예를 들어, 곤충의 더듬이는 후각, 청각, 촉각 역할을 하는 중요한 기관입니다. 특히 더듬이로 냄새를 맡아서 사물을 구별하는데 더듬이가 예민하지 못하면 먹을 것을 탐지하거나 공기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영적인 감각이 예민하지 못하면 살아갈 생존 능력이 부족한 것입니다. 죽이려는 마귀가 득세해도 이놈이 나를 덮치는지 죽이는지 분별하지 못하면 그냥 아무 감각 없이 받아들였다가 그 속에 파묻히고 사로잡혀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별하지 못해서 불의의 병기로 죄짓는 일에 자기 일생을 다 내주는 사람이 좀 많습니까? 우리는 먼저 분별할 수 있도록 영감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분별을 잘해도 영적인 힘이 없으면 죄를 이길 수 없고, 죄짓게 만드는 마귀역사를 몰아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여, 나에게 영력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능력도 권세도 없이 그저 내 육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한다면 그것은 죄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육신의 소욕이 성령의 소욕을 대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소욕과 육신의 생각이 내 평생 나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성령의 소욕과 성령의 생각이 나를 장악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죄도 이기고, 불의도 이기고, 육신의 소욕도 이기고, 육신의 생각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을 내 생애 최고의 보배로 여겨야 합니다. 성령 충만만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끝까지 이기지 못해서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갈급했습니다. 드리고 싶어서 못 견뎠습니다. 영적인 충동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자기 전답을 팔아 바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 다 바치면 뭐 먹고살지?” 하는 육신의 요구가 생기자 그 육신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일에 육신이 “피곤하다. 가지 말자” “힘들다. 가지 말자” “배고프다. 밥이나 먹자”라고 육신이 볼 때 좋은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3)라고 했으니 육신의 요구는 하나님 앞에 반드시 죽을 것들입니다. 육신의 요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죽였듯 우리를 죽이는 것입니다. 육신이 “잠이나 실컷 자자” 하면 “기도하러 가자”, 육신이 “십일조 못 하겠다” 하면 “십일조 먼저 드리자”라고 말할 수 있는 영력이 있어야 합니다. 육신의 요구가 내놓은 의견이 영적인 요구 앞에 언제나 묵사발이 될 만큼 육신의 요구를 이길 영적인 힘, 곧 영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믿음 안에서 예수 안에서 절대로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믿음 안에서 의를 지키고, 거룩을 지키고, 선을 지키고, 사랑하고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를 바랍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600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