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9-01-03 00:34:06 ]
신앙생활에 몰입하라
우리는 육신을 위해서는 아주 부지런합니다. TV를 볼 때는 눈도 안 뗄 정도로, 밥 먹을 때 수저 잡는 것은 실수하지 않을 정도로 부지런합니다. 잠을 잘 때 누가 깨우기라도 하면 “왜 자는 사람 깨워요?” 하며 얼마나 열심히 자는지 모릅니다. 아마 우리가 TV를 볼 때처럼 하나님을 향해 눈을 그렇게 고정하고 몰입해서 신앙생활 한다면 아마 영적인 세계에 금방 들어갈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룻밤 깊은 잠을 자는 것처럼 몰입한다면 믿음이 엄청나게 성장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는 그렇게 몰입하지 않는 것은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만큼 영적인 일과 하늘의 신령한 꿈에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육신의 요구는 100% 들어주지만 영적인 요구는 잘 들어주지 않습니다.
배고플 때는 밥 먹을 줄 알고, 빨리 라면이라도 한 그릇 끓여 먹어서 배고픈 것을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영적으로 주린 것은 모릅니까? 영적으로 주린 것을 느끼는 사람은 예배를 빠질 수 없습니다. 추우면 몸을 따뜻하게 할 줄 알고, 더우면 옷을 벗고 시원한 곳으로 가서 더위를 식힐 줄 압니다. 그런데 왜 죄지어도 회개할 줄 모르고, 세상에서 찌들어 사는 자신의 영혼을 보호할 교회로 오지 않습니까? 영원히 살 내 영혼은 왜 아끼지 않습니까? 영적인 삶의 감각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육신은 꼬집어 뜯으면 아픕니다. 그러나 죄지을 때는 아무런 감각을 못 느낍니다. 육신의 고통보다 영적인 고통을 더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합니다. 영적인 고통을 모르는 사람은 영적인 고통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영감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영감이라는 말은 영적인 감각을 말합니다. 내가 교회 가서 말씀을 안 듣는데도 내 영혼이 주린 것을 못 느끼면 그 사람은 영적 감각이 없는 사람이요,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 건강한 것입니다. 도토리 껍데기가 왜 있는 줄 아십니까? 알맹이를 보호하려고 있습니다. 모든 열매의 껍질은 그 안에 있는 알맹이를 보호하려고 있습니다. 나의 육신이라는 껍데기도 내 영혼을 보호하려고 존재합니다. 우리가 영적생활에 돌입하면 도토리 껍데기 같은 육신이 내 영혼을 위한 일에 값지게 쓰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사명의 길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어머니가 교회 다니시는 것을 반대하며 무섭게 핍박하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린 제 마음속에서 이런 불만 섞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다른 애들은 자기 아버지, 자기 어머니가 교회 집사님이니 교회 가는 일에 전혀 문제가 없는데 나는 왜 이렇게 예수 믿는 일에 어려움이 많고 힘든지 모르겠다. 나도 저런 집에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을까? 왜 이런 집에 태어나서 신앙생활을 이렇게 힘들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내가 가야 하는 길과 남들이 가는 길을 자주 비교합니다. ‘저 사람은 저렇게 편하게 가는데, 나는 왜 이렇게 힘들게 가나?’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편하게 가고 있는 코스는 그 사람의 길이요, 내 길은 아닙니다.
우리는 가정의 일이나, 밖의 일이나, 환경이나, 어떤 일이든 내 신앙생활을 방해하고 믿음을 방해하는 일이 올 때, ‘이것은 내가 당연히 가야하는 코스다’라고 생각하십시오. 힘들고 어렵더라도 내가 가야 할 코스는 이 길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마다 절대 같은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목회를 얼마든지 편안하게 할 수 있습니다. 설교 시간을 줄이고, 평일 공예배 설교는 부교역자에게 맡기고, 일주일 내내 주일 설교 준비만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심방도 안 다닐 수 있습니다. 큰 성전을 지으려고 고생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길 끝에는 더 큰 축복이 있고, 면류관이 있고, 고생 끝에 얻는 행복이 있기 때문에 험난한 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제는 신앙생활 하다가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길 때, ‘나만 왜 이러냐? 왜 나만 힘드냐?’ 그러지 마십시오. 내가 겪는 고난을 놓고 차별받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남들이 편안한 길을 간다고, 나도 그리로 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험난한 길이 더욱 값지고 위대하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왜정 시대에도 핍박을 피해 타협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주기철 목사나 손양원 목사 같은 분들은 잔인하게 핍박당하고 순교했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주님을 따라올 수 있다고 하나님이 나를 믿어 주신 것이니 도리어 “주님, 저에게 이런 환경 주심을 감사합니다. 저는 끝까지 이기고 갈 것입니다”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이 크더라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코스는 나를 믿고 주신 코스이니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나를 믿어 주신 주님을 실망시키지 말고 끝까지 승리하며 나아가기로 마음먹어야 합니다.
자기가 걸어가야 할 믿음의 길을 앞에 놓고 다짐해 보십시오.
‘이것은 내가 가야 하는 길이다. 주님이 주신 길이라면 나는 가야 한다. 주님이 날 사랑하시는 일에 후회하셨던가? 나에게 축복을 주는 고난의 코스인 십자가를 피하셨던가? 가야바의 뜰에서 그 모진 매를 맞는 길을 피하셨던가? 이 땅에 오셔서 수난과 고통의 길을 피하셨던가? 주님도 피하지 않으셨으니 나도 주님과 같이 가는 고난의 길을 절대 피하지 않으리라.’
내게 주어진 사명의 길을 가는 일에 어떤 고난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행복으로 여기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606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