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9-01-17 02:05:10 ]
주님이 주신 그 길로 가면 돼
언제인가 송구영신예배 때 설교하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절규하신 예수에 대한 본문이었습니다.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2~44)
저는 기도하면서 “주님, 왜 그렇게 이마에서 떨어지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모세혈관이 터지도록 기도하셨나요?”라고 계속 물었습니다. 그 후로 몇 달간 울면서 기도해 보고, 몸부림치고 기도해 보았지만 아무리 온몸을 폭발시킬 듯한 각오와 결심으로 부르짖어 기도해도 땀구멍 속에서 피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진을 빼며 기도했는지 와이셔츠를 벗어서 물에 담그면 기름이 둥둥 떴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얼마나 절규하며 기도하셨기에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어 떨어졌을까요?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쓴잔이 지나갈 수만 있거든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십자가의 코스를 안 갈 수만 있으면 피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십자가의 코스를 가기 싫다는 의향을 비추신 것은 아닙니다. 기어이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라면 그 길을 가겠으니, 죽음의 길을 견디고 갈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몸부림치는 기도를 마치자 로마 병정들이 예수를 붙들어 가기 위해 왔습니다. 그때 기도하던 제자 셋은 졸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잡혀 가시자 제자들은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이런 배신이 어디 있습니까? 죽을지라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던 제자들이 아닙니까? 하지만 주님은 그런 배신을 당하면서도 “왜 나를 배신하느냐?”고 단 한 번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물을 만한 육신의 소욕이 없으신 분입니다. 주님은 빌라도에게 “당신은 로마의 법으로 죽을죄가 없는 나에게 무슨 권리로 사형선고를 내립니까?”라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배신과 멸시와 천대와 무시를 당하는 그 길이 주님께서 가야 할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 믿다가 배신과 멸시와 천대를 당해도 왜 그러냐고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 때문에 닥쳐온 고난이라면 그 길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니 묵묵히 가시기 바랍니다. 그냥 주님이 주신 그 길을 가면 됩니다.
죄를 정복하고 미혹 이겨내야
우리는 사소한 일로 하나님께 불평불만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이 왜 시험 드는 줄 아십니까? 아직 하나님의 진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만나 보지 못해서 시험 듭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주님이 나를 사랑하셨다는 진실을 알고, 내가 주님의 은혜로 살아야 한다는 진실만 있으면 시험 들지 않습니다. 진실이 없어서 무너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만든 피조물이 멸망하지 않도록 아들을 죽이는 일에 진실하셨습니다. 아들을 죽인다고 작정하시더니 그 작정대로 아들을 십자가에 잔인하게 매달아 죽이는 데까지 진실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절규하는 아들을 죽여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아버지의 고뇌를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죽이기로 작정하시고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고, 죽이는 일을 과감하게 시행하셨으니 하나님은 승리자이십니다. 인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장애물이 없었습니다. 아들이 눈물을 뿌리며 땀이 떨어지는 핏방울이 되도록 몸부림을 치며 기도했지만 그것이 장애물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들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일에 장애물이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구하여 열 두 영이나 되는 천사를 불러다가 자신을 결박하는 자들을 단번에 해치워 버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마 26:53). 그러나 그들 앞에서 자기 능력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죄인 취급을 당하셨습니다.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마침내 인류를 위해 죽으시고 구원하시는 일에 이기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 하나 사는 일에도 승리하지 못합니다. 나 혼자 복 받고 행복해지는 일에도 승리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 앞에서 죄인 대우를 받으면서도 아픔과 고통을 정복하셨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예수가 가는 길의 장애물이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에도 장애물이 없어야 합니다. 새벽예배 가는 일에 무엇이 장애물입니까? 피곤하고 잠 오는 것이 장애물이 될 수 없습니다. 십일조 하는데 무엇이 장애물입니까? 인색한 그것이 장애물이 될 수 없습니다.
장애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염려도 이겨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일에 장애물이 없었듯이, 우리도 주님을 따라가는 일에 어떤 장애물도 없기를 바랍니다. 죄를 정복하고 미혹을 이겨 내고 신앙생활을 반대하는 모든 것들을 다 다스리고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608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