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 영적생활·41]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

등록날짜 [ 2019-03-20 16:39:59 ]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섬기는 신앙생활

사내아이 대부분이 그렇듯이 저도 어릴 때 개구쟁이 짓을 많이 했습니다. 학교 친구들을 밀어 도랑에 빠뜨리기도 하고, 우물에서 물을 퍼다 뿌려서 옷을 젖게 했습니다. 그때는 그런 장난이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3학년 때 성령받고 목사님 설교 말씀을 듣고 예수 믿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면서부터는 그런 행동이 전부 죄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제가 달라졌습니다. 학교에서도 얌전해졌습니다. 친구들이 와서 “야, 너 왜 그러냐? 무슨 일이냐?”라고 비아냥거리고 장난쳐도 혹시 성내면 죄를 지을까 봐 조용히 참았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고 계신다’라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지냈습니다. 그때 가졌던 마음이 지금까지도 제 안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교인들이 대화하고 있는데, 제가 지나가다가 우연히 듣게 될 때가 있습니다. 가만히 들어 보면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어떻고 하는 남의 말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성도여!” 하고 인기척을 냅니다. 그러면 “어머! 목사님이시네!” 화들짝 놀라며 급히 하던 말을 멈추고 아무 일도 없는 체합니다.


목사인 저는 남을 비판하는 교인들을 말씀으로 권면할 수는 있지만 죄인이라고 심판하지 못합니다. 심판할 권리가 없는 저를 보고 왜 그렇게 깜짝 놀라는지 모릅니다. 남을 흉보고 비판하는 일이 목사 앞에 놀랄 일이라면 무소부재 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얼마나 더 놀라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격이시기에 내가 무시하면 무시당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결코 나에게 무시당하실 만한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 인간을 통해 오직 영광만 받으실 분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취급할지라도 그분은 살아 계십니다. 내가 무시할지라도 그분은 존재하시고, 내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따져도 그분은 살아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불꽃같은 눈동자로 나의 모든 언행심사를 다 듣고 보고 감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시139:2~4).


우리는 ‘코람데오(coram deo)’의 신앙, 곧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 앞에서 감시받는 것처럼 부자유하게 수동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분의 마음을 깨달아 알며, 그분을 기억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분을 뜨겁게 사랑하고 경외하고 매사에 하나님을 인식하며 행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을 인격적으로 만드신 창조자 하나님은 인격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은 기뻐할 줄 아시고, 슬퍼할 줄 아시고, 속상해할 줄 아시고, 아파하고 괴로워할 줄 아시고, 사랑할 줄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를 드리러 그분 앞에 나올 때,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 주님 일에 충성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알고 표현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손에 안 잡히고, 눈에 안 보여도 그분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의 음성이 직접 우리 귀에 안 들려도 성경을 통해, 목사의 설교를 통해 지금도 들려주신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날마다 숨 쉬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는 것을 인정하며 섬세한 하나님의 배려를 알고 깨닫고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섬기는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 내 안에 모신 그분 앞에서 날마다 옷깃을 여미고 내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철든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분의 뜻을 더 좇아서 살지 못하고, 그분을 온전히 경외하지 못하고, 그분을 더 뜨겁게 사랑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랑에 감동하고 감사하라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간의 종살이를 끝내고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홍해 바다에 가로막히자 감사는 곧 원망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이적으로 홍해 바다를 육지처럼 건너자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하나님께 최고의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렸습니다.


홍해를 건너 광야의 뙤약볕에 서자 다시 감사가 원망으로 바뀌었습니다.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올 때는 감사했지만 잠시 후에는 또 원망했습니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릴 때는 감사했지만 잠시 후에는 고기가 먹고 싶다면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늘을 날던 메추라기가 땅에 떨어져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되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했지만 얼마 후에는 금송아지 형상의 우상을 만들어 숭배했습니다.


이처럼 감사를 잊고 원망과 불평을 반복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우상과 바꾸는 죄를 범했고, 결국 여호수아와 갈렙,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자손들 외에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망하고 말았습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극치의 타락은 바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감사를 누구에게인가 빼앗겨 타락해 놓고도 자신의 타락을 알지 못합니다. 신앙생활의 밑천을 빼앗기고 껍데기만 들고 교회에 나와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지만 감사가 없다면 그 안에 진실도 없는 것입니다.


은혜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잊고 감사하지 못하게 되었다면, 원수 마귀에게 감사를 빼앗겼다는 사실을 알고 싸워서 이겨 잃어버린 감사를 되찾아야 합니다. 날마다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불타서 마음껏 감사해야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주님의 은혜에 감동의 눈물로 감사하며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계속>


감시받는 것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마음을 깨달아 알며
그분을 기억하고, 뜨겁게 사랑하며
경외하고, 매사 하나님을 인식하며
눈물로 감사하며 사는 성도가 되어야


위 글은 교회신문 <616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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