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 기도생활(6)] 예수님도 부르짖어 기도하셨다

등록날짜 [ 2021-05-20 12:05:16 ]

이스라엘 백성이 1년에 한 번씩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릴 때 대제사장이 양의 피를 가지고 성막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 대제사장이 양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양의 피를 보시고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대제사장이 백성에게 그들의 죄가 용서되었다고 선포할 때 그들은 나팔을 불고 춤을 추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들은 죄를 용서받았다는 데 들떠서 반미치광이처럼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죽음에서 구원받고 저주에서 용서받은 것이 너무도 기쁘고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양을 잡아 제사 드려서 죄를 용서받은 것도 이토록 좋아서 온 백성이 춤을 추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이 흘리신 피의 공로로 구원받은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그 기쁨을 표현해야 하겠는지를 생각해 볼 때 죽음에서 다시 산 자는 절대로 조용히 “주여, 감사합니다”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색하는 곳이 아닙니다. 정신을 수양하는 곳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내 대신 죽어서 나를 죽음에서 살리신 생명이 넘치는 곳, 감격이 넘치는 현장입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절대로 조용할 수가 없는 곳입니다.


부르짖어 기도하는 이유
하나님은 독생자의 명예를 걸고 기도에 응답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만인에게 주신 약속이기에 우리는 악착같이 그분의 약속을 믿고 기도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는 약속을 받은 자가 약속하신 이에게 당당하게 구하는 권리입니다.


어떤 사람은 “꼭 기도해야만 되나? 하나님이 다 아시는데”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이 모르실까 봐 그렇게 매일 기도하셨겠습니까. 또 하나님이 제자들의 필요를 모르셔서 제자들이 그렇게 기도에 힘썼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로 구한 것만 자신의 명예를 걸고 상관하시고 책임지시기에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불가능이 난무한 이 땅에 사는 우리는 하나님의 간섭 하에 있기 위해, 하나님이 나의 문제를 책임지시도록 하기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도 기도할 필요가 있으셨기에 늘 한적한 산에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조용히 마음속으로만 기도해도 되었다면 일부러 산에 올라가실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예수께서는 마음을 집중하여 부르짖어 기도하기를 원하셨기에 일부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우리도 집에서는 부르짖어 기도하기 힘들고, 한다고 해도 누가 듣지 않나 하는 생각에 남을 의식하게 되어 진실이 식어질 수 있습니다. 또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하면 여러 가지 잡념으로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되기 쉽습니다. 이런 잡념에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교회에 나와 부르짖어 구하는 것이고 예수께서도 산에 가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목사가 “우리 모두 통성으로 기도합시다”라고 말할 때 굉장한 철학적 사색에 잠긴 사람처럼 부르짖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 속에서 말하는 기도가 무엇인지, 주님이 기도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고 계신지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을 보고 “하나님이 죽었나? 아니 다른 사람들처럼 조용히 기도할 것이지 왜 그렇게 떠들어?” 하며 이상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이 샤머니즘이라고 몰아세우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영적생활이 무엇인지 모를뿐더러 기도 응답의 체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중병의 환자가 기도를 통해 나았다고 하면 신기하게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마귀는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응답이 올 때 그를 지배하고 있던 마귀는 떠나가야 하기 때문에 마귀역사는 항상 부르짖는 기도를 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불가능이 난무한 이 땅에서
하나님께 문제 해결받도록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해야
사색하듯 조용히 기도하면
잡념으로 중언부언하기 쉬워



위 글은 교회신문 <69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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