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0-02-22 16:19:17 ]
수시로 변하는 ‘내 모습’ 엄중히 질책하며
영원히 사는 문제에 스스로를 지켜나가야
누가복음 16장에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가 나옵니다. 거지 나사로는 자신의 힘으로는 물질과 환경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육체는 병들어서 개가 그의 헌데를 핥았다고 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부자는 날마다 호화로이 잔치하며 인간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을 다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숨이 끝나는 순간, 나사로는 낙원에서 얻고 싶은 것을 다 얻은 행복한 자가 되었고, 부자는 음부의 불꽃 가운데서 울부짖는 절망적인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이 땅에서는 고통 중에 살았으나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붙어 있었기에 목숨이 끝나는 순간 그 모든 부유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와 같은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두렵게도 부자와 같이 하나님과 분리되려고 하는 것일까요? “주여, 믿습니다!”라고 아무리 기도한다고 해도 주님과 분리된 자에게는 절대로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주님께 붙어서 신앙생활하고 있는지, 아니면 주님과 분리된 채 주님과 아무 상관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지 확실히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변하지 않는 믿음 소유해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창조한 본질의 모습엔 변화가 없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많이 흘러도, 돼지는 언제나 “꿀꿀”거리고 개는 언제나 “멍멍” 소리를 내며 짖습니다. 감나무에서는 언제나 감이 열리고, 모과나무에서는 모과가 열리며 사과나무에서는 언제나 사과가 열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믿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서 왜 하나님 자녀로서의 순수한 그 첫 사랑의 믿음을 그대로 간직하지 못하고 자꾸만 세속적으로 변하는 것일까요? 신앙생활은 영원히 사느냐 죽느냐 하는 중대한 문제이기에 믿음만큼은 절대로 변해서는 안 됩니다.
해 아래 만물은 변하지 않는데 신앙생활하는 일에, 영원히 사는 일에 왜 우리는 그렇게도 잘 변할까요? 왜 그리도 하나님 앞에 변덕을 부리는 것일까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고, 주님 뜻대로 살겠다고 결심했다가도 기분이나 감정이나 환경에 의해 그 결심이 흔들리고 변하는 것을 보면, 우리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변하지 않는 만물을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변하는 ‘나의 모습’에 대해 스스로 엄중히 묻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변하면 버려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변했다’라는 말은 ‘사단적이다, 마귀적이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할 천사가 완전히 변해서 하나님을 도전하는 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보고 변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변했다’라는 말은 ‘협력해야 할 자가 도전자가 되었다, 충성해야 할 자가 원망하는 자가 되었다, 감사해야 할 자가 불평하는 자가 되었다’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과의 충만한 관계가 절대로 변질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애에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때로는 시골에서 좋은 생선이라며 선물이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열어보면 속이 썩었습니다. 선물을 준 사람의 마음만 받고 썩은 생선은 버려야 합니다. 어떤 때는 포도 선물을 받습니다. 택배로 보내온 포도는 포도즙 틀에 넣은 포도처럼 다 터져 있습니다. 그 포도를 어떻게 먹겠습니까? 선물 준 사람의 마음만 받고 포도는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변하면 아무리 아까워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버림받는 인간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기도하리라’ 결심하고는 기도하지 않고, ‘전도하리라’ 결심하고는 전도하지 않고, ‘사랑하리라’ 결심하고는 사랑하지 않고, 그저 감정이 변하는 대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인간을 아무리 ‘감정의 동물’이라고 하지만 이 감정을 자기 자신이 잘 되는 쪽으로, 자기를 성화(聖化)시키는 쪽으로 조절을 잘 해야 합니다. 자신이 가진 감정을 자기가 나쁘게 변하는 데 사용하면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감정의 희로애락을 조절하라
교회에서도 유난히 화를 잘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주의 일을 잘하다가 조금만 다른 사람이 간섭하면 화를 냅니까? 그런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감정 조절이 잘 안 돼서 그러는 것입니다. 감정 조절을 잘못해서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성령이여, 내 안에 오셔서 희로애락을 가장 균일성 있게 조절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세요”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자기 자신이 하는 것 같지만 주님이 하게 하시는 것이며, 설교도 자신이 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쓰시는 것이며, 목회도 자기 힘으로 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고 있다고 믿는 자는 매사에 자신이 넘칩니다. 비록 자신은 힘이 없고 능력이 없으나 전지전능하신 자가 붙들고 쓰시니 얼마나 힘이 되고 능력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자신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감정에 따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았다 나빴다 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181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