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0-09-01 07:28:51 ]
성막은 하나님이 직접 백성 다스림을 의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성막을 짓게 된 동기는 하나님의 특별한 지시, 하나님의 명령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명령이 아닙니다. 지구 상에 모세라는 단 한 명을 통해 주신 명령이었기 때문에 모세는 정말 축복받은 자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바로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하나님이 거할 성소를 지으라고 명령하신 것은 대단한 축복입니다. 성막이 완성되고 하나님이 그 성소에 임재하실 때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했다고 했습니다(출40:34~35). 그 충만한 영광 가운데 있다는 것이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얼마나 큰 축복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어려운 문제가 첩첩이 쌓였습니다. 광야 생활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광야는 한 시간만 서 있으면 열사병으로 당장에 숨이 끊어질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농사를 지을 수 없고 목양도 할 수 없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그런 절망의 장소에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 애굽 왕 바로의 앞에서 끌어낸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시기 위한 성소를 지으라고 할 때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칠흑같이 한 발짝도 갈 수 없을 만큼 희망이 없는 그 상황에서 “모세야, 내가 거할 성소를 지어라”고 하신 말씀은 한 줄기 빛과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굉장한 축제가 벌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하면서 그 기쁨은 절정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성소를 짓기 위해 그들의 전 재산을 털어서 모세 앞에 내놓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성막을 지으라는 것은 하나님이 있을 곳이 없어서 거기 계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막을 짓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러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친히 다스리는 왕이 되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길을 이동할 때 성소 안에 있던 법궤가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의 맨 앞에 자리했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임재하신 성막의 법궤를 들고 요단강을 밟을 때 요단강이 갈라지고 여리고를 돌 때 여리고가 무너졌습니다. 그들이 법궤를 모시고 가는 곳마다 전쟁에서 승리했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막 자체가 큰 축복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께서 날 위해 죽으시고 피로 값 주고 사시어 나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습니다. 이때부터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그것뿐입니까? 죄에서 저주에서, 사단, 마귀, 귀신의 권세에서 승리할 수 있는 자유와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나를 영원히 보존하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시어 내 안에 와 계시게 하셨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 이스라엘 백성이 받은 축복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큰 축복을 받았습니까? 과거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 안에 계시던 하나님께서 지금 내 심령 안에 성령으로 와 계신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내가 거할 성소를 지으라”는 하나님 말씀 앞에 이스라엘 백성이 감사드린 것보다 더 큰 감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 성막의 모양처럼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는 성막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 즉,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오늘까지 어떤 모습으로 신앙생활 해왔는지를 거울처럼 훤히 보게 되고, 예수 믿는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기도하지 않고는 신앙생활 할 수 없다는 것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또 성막을 알면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점점 성막의 모양처럼 바뀌는 것입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206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