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 성막의 다른 이름 ‘장막’의 의미

등록날짜 [ 2010-09-28 21:05:05 ]

세상의 낙원 아닌 하늘의 소망을 품고
영원한 생명의 부요로 신앙생활 해야

성막(聖幕)은 각각 그 특징과 필요에 따라서 부르는 명칭이 달랐습니다. 성막을 겉에서 보고 모양으로 부를 때는 장막(帳幕), 하나님이 친히 임재하시는 장소라고 부를 때는 성소(聖所), 하나님과 현장에서 만나는 장소라는 의미일 때는 회막(會幕), 죄로 죽게 된 자를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 그 말씀을 듣고 회개케 하는 장소를 의미할 때는 증거막(證據幕), 하나님의 법대로만 진행하는 장소일 때는 법막(法幕)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속에 어떤 복음과 진리와 교훈이 있는가를 하나하나 살펴보고자 합니다.

장막은 잠시 머무는 장소이다.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출25:9) 성막을 ‘장막(帳幕)’이라고 부른 것은 겉모양이 천막(tent)과 같기 때문입니다. 성막을 장막이라고 한 것은 긴 순례 여정을 암시합니다. 장막을 치는 곳은 잠시 머무는 장소지 영구적으로 머무는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 성막을 장막처럼 설치하도록 하신 것은 이동할 때 언제든지 치고 걷기 편리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장막은 오늘날 예수 믿는 우리의 신앙 여정, 즉 삶의 목적이 잠시 있을 이 땅의 것에 있지 않고 영원한 것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변화산상에서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나타났을 때 베드로는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17:4)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이 땅의 영원한 초막에 거하시는 분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땅에 천막을 짓고 살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엘리야도 모세도 땅에 천막을 치고 살기를 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눅9:58). 천지 만물을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신 그분이 왜 머리 둘 곳이 없겠습니까? 주님은 어디를 가든지 대환영을 받았습니다. 부자 삭개오는 전 재산 절반을 주님께 드리면서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데 쓰시라고 내놓았습니다. 주님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분입니다. 과연 그런 분이 머리 둘 곳이 없겠습니까? 이 말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자체가 이 세상 삶의 부요를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처럼 너희도 이 세상에서 지상낙원을 꿈꾸지 말라, 이곳에 머리를 두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겉치레가 아닌 영원한 부요로 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8:9)고 하신 말씀 속의 ‘부요’란 물질적 부요, 육체적 부요와 같은 겉치레 부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한 없이 쓸 수 있는 것이 참 부요입니다. 이 세상 최고의 부요가 돈이라고 하지만 목숨이 위협당하면 돈은 다 줄 테니 목숨만 살려달라고 하면서 싹 내놓을 것입니다. 목숨이 돈보다 더 큰 부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70년, 80년 목숨이 부요라면 영원한 생명은 얼마나 큰 부요입니까?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유가 바로 이 영원한 생명의 부요를 주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는 목적을 다른 부요, 즉 겉치레 부요를 축복으로 오해하고 그것에 농락당하고 있습니다. 기복신앙이 대표적인 ‘겉치레’입니다. 교회를 마치 자신의 출세를 위한 장소, 하나님이 돈이나 쏟아 붓는 장소, 육신의 때의 정욕을 불태우는 곳으로 알고 그런 복을 맹목적으로 구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 땅에 거할 처소가 아닌 영원히 거할 처소를 예비하러 오신 분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3). 마치 장막이 그 안에 있는 성소의 기구들을 보존하기 위해서 있듯이 우리 육체라는 장막도 내 영혼을 보존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을 위한, 즉 겉치레를 목적으로 하는 신앙을 버리고 영원한 부요로 내 안의 속 사람이 빛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210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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