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의 자격에 대해-14] 믿음에서 떠난 사람을 방관하지 않는 정신

등록날짜 [ 2011-04-20 10:07:38 ]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위험 무릅쓰고 
한 영혼 더 살리려는 마음을 가져야

교사는 학생들이 타락해서 믿음에서 떠나 예수 안 믿는 것을 절대 방관할 수 없습니다. 만약 지금 눈앞에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광경을 보고 “잘~ 죽는다!”고 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쫓아 들어가서 건져내고 싶은 것이 사람이면 누구나 품는 마음일 것입니다.

자기가 첨벙 물에 뛰어 들어가든지 아니면 소리쳐서 다른 사람을 불러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려고 애쓸 것입니다. 자기 눈앞에서 사람이 빠져 죽는 것을 방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내가 물에 뛰어들어 빠져 죽을지라도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고 싶은 그 마음이 바로 교사(敎師)의 마음입니다. 이런 영적인 인지상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어쩌면 영적인 천륜(天倫)이 있어야 교회학교 교사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지옥을 선명하게 실감하지 않은 자가 어찌 교사를 하겠습니까? 교사 직분을 맡은 목적이 지옥 갈 영혼을 구원하는 것인데, 지옥을 모르는 자, 지옥을 실감하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교사 노릇을 하겠습니까? 지옥이 실감 나지 않는 사람은 교사 직분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지옥이 실감 나야 그 몸부림을 치고 쫓아다니면서 학생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여리고로 지나가던 사람이 강도를 만나서 거반 죽게 되었다고 했습니다(눅10:25~35). 레위인도, 제사장도 그 사람을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그 사람을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주인에게 부비(浮費)를 주며 돌봐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부비가 더 들어가면 다녀오는 길에 주겠다고 말합니다. 여리고에서 강도 당한 사람을 돕는 일이 어쩌면 당연한 것 같지만 실상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제가 성지 순례를 하던 중에 직접 여리고로 가는 길을 가보았습니다. 거기는 지금도 사람이 살 수가 없는 곳입니다. 여리고로 가는 길에 있는 낭떠러지는 얼마나 험한지 쳐다보면 현기증이 날 지경입니다. 낭떠러지가 200미터는 되는 것 같습니다.

거기서 성경에 나오는 강도 만난 자리라고 전하는 곳에 가보았습니다. 한적하고 길이 사나워서 누군가 밀면 그대로 떨어져서 죽을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 하나 죽이는 일은 간단해 보입니다. 그런 위험하고 한적한 길에서 강도가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아 두들겨 패고 물건을 빼앗았습니다.

레위인이 그 길로 지나가다가 강도 만나 거반 죽게 된 사람을 볼 때 불쌍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냥 지나 갔겠습니까? 자기도 강도를 만날까 봐 두려워서입니다. 제사장도 강도를 만나 쓰러진 사람이 부담스러워서 그냥 간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자기도 강도 만나서 그렇게 될까 봐 두려워서 도망간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는 강도에게 붙들려도 좋다, 절대로 이 고통당하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다는 생각으로 그를 이끌어서 주막까지 데리고 간 것입니다. 이 정신을 가져야 교사입니다. 이 정신 없이는 교사가 될 수 없습니다.



저도 어려서부터 주일학교에 다니면서 많은 교사를 만났는데, 어떤 교사는 제가 교회에 안 가면 집에까지 와서 업고 갑니다. 그런데 어떤 교사는 아무리 교회에 안 가도 집에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를 만나면 “애들 교회 좀 보내세요”라고 그저 말만 합니다.

교사는 학생이 교회에 왔느냐 안 왔느냐 하는 실적이 우선이 아닙니다. 그 영혼이 영적으로 사느냐 죽느냐 하는 영적인 실적이 진짜 실적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사들은 그런 영적인 실적을 계수하려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영적인 계수를 해 보십시오. 주님 앞에 서서 내가 주일학교 학생들을, 중고등부 학생들을 어떻게 영적으로 성장하게 했는지 심판받을 때 당신은 과연 자신이 있습니까?

성지 순례 차 그리스정교 수도원에 가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는 수도승들의 유골이 창고 속에 꽉 차 있었습니다. 모두 수도하다가 죽은 자들의 것입니다. 그리스정교는 마치 수도(修道)하는 것이 신앙의 목적인 것처럼, 전도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오직 평생 수도만 하다가 죽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자기 혼자 수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만난 예수를 땅끝까지 전해서 지옥 가는 수를 줄여야 합니다. 자기 혼자 수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기독교는 자기 혼자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도 잘 되어야 합니다. 주기도문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 기독교를 자기 혼자 수도하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나’부터 잘 믿어야 합니다.

언제나 문제는 ‘나’부터입니다. 내 문제를 못 깨달으면 그만큼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학생들에게 천국을 밝히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가,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위대한가를 가르쳐야 합니다.

옛말에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습니다. 그럼, 떡잎을 누가 만듭니까? 앞으로 세계를 움직이고, 교회를 움직이고, 교계를 움직이는 사람을 누가 만듭니까? 어릴 때부터 교사가 자기가 맡은 학생을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

※2001년 7월 윤석전 목사 <교사세미나> 강의 중 발췌

위 글은 교회신문 <23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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