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의 ‘성막과 예수 그리스도’(40)] 번제단의 제물처럼 나를 부인해야 산다

등록날짜 [ 2011-06-07 18:01:18 ]

우릴 위해 죽으신 주님처럼 나도 마땅히 죽어야
내가 죽는 경험 없이는 바른 신앙생활 절대 못해

성막에 들어가서 처음 만나는 번제단(燔祭壇)은 이스라엘 백성이 죄에 가로막혀 하나님 앞에 나가지 못할 때 정결한 짐승을 잡아 희생(犧牲)의 제물로 드려 제사지냄으로써 용서받는 곳입니다.
그래서 성막에 들어가서 제사를 지낸 자의 뇌리에 가장 선명하게 남은 성막의 첫인상은 바로 자기 때문에 죽은 짐승이 흘린 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 제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우리를 죄에서, 저주에서, 영원한 지옥 형벌의 멸망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라는 오늘날 성전에 들어가서 예배드리는 우리의 뇌리에 가장 선명하게 남은 첫인상도 바로 내 죄 때문에 죽으시고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교회를 찾아 예배드리는 수많은 이에게 가장 먼저 ‘나는 죽어야 할 죄인이구나’ 하는 인상을 받게 해주어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 하나님 말씀을 듣는 순간에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자처럼 영원히 멸망할 자로 자신을 발견해야 합니다. 동시에 ‘그런데 예수가 나를 위해 죽었다. 내 죄를 대신해 희생의 제물이 되셨다’는 소식을 접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여! 내 죄를 사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내가 죽어야 할 대신 하나님의 아들이 피 흘리시고 죽었다는 사실이 복음이며, 그 복음을 만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다음에 ‘주님이 나를 위해 이렇게 죽으셨으니 이제 나도 나를 완전히 죽이고 주님만 따라가리라’고 결심합니다. 이렇게 나는 죄인이라고, 나는 주님의 사랑에 노예가 되었다고 무릎 꿇는 것이 믿음입니다. 주님의 죽으심과 내 죽음이 예수의 피로 절정을 이루며 만나는 곳이 교회입니다.

나를 부인하는 십자가의 삶
십자가 사건을 만난 사람은 주님이 내게 어떤 요구를 해도 거절할 수 없습니다. 어떤 내 주장도 내세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도 매 맞으라면 매를 맞으시고, 저주받으라면 저주를 받으시고, 모든 권세를 버리고 아버지가 시키시는 대로 죽기까지 순종했는데, 우리는 무엇이 잘났기에 우리 안에 자아가 그대로 살아서 죽지 못하는 것입니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는 주님 말씀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만 따르려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이 자신을 부인하려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지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에서 인간적인 위로만 받으려고 합니다. 그저 육신을 편하게 다독거려 주기만을 바랍니다. 그러다 보니 “목사님, 한 주간 동안 성도들이 세상에서 얼마나 시달렸습니까. 그런데 교회에 와서까지 마음 불편하게 하면 되겠습니까. 말씀이라도 무조건 수고했다고 위로해 주십시오” 하며 은근히 듣기 편한 설교를 하라고 강요합니다.

내가 자복할 때 오는 주님의 위로
그렇다면, 목회자가 뻔히 성도들이 죄짓는 것을 보고서도 위로만 해주라는 것입니까? 세상과 타협하여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데 방관하라는 말입니까? 어떻든 잘못은 고쳐야 합니다. 고치려면 상처를 드러내는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나를 부인하고 죄를 자복(自服)해야 나를 죽이려는 원수 같은 사단, 마귀, 귀신의 손에서 나를 건질 수 있습니다. 고통이 있더라도 내 속에 있는 죄를 끄집어내야 주님의 위로가 임합니다. 세상에 빠진 나를 건져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주님의 위로입니다. 내가 자복하여 나를 제물(祭物) 잡듯 잡아야 그때부터 주님이 일하실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내가 죽어야 내 안에 있는 주님이 사실 수 있다는 말입니다. 죽지 않고 부활이 없듯이, 내가 죽는 경험이 없이는 절대 내 안에서 주님이 사시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죽어 있는지 살아 있는지도 모르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죽을 자로 발견된다는 것
예배 시간에 설교를 듣다 보면 전부 내 얘기만 하는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 많은 사람이 “목사님이 은근히 빗대어 나를 친다”라며 자존심을 앞세웁니다. 그러나 내가 완전히 죽어 있는 사람은 “오늘 제물을 잡듯이 내가 잡히는구나. 주여, 나를 받으시옵소서. 지금도 내가 살아서 안 잡히려고 하고 있으니 나의 이 못된 자존심이 무너지게 하옵소서. 이렇게 나를 잡아서 하나님께 올려 드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라고 고백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설교 말씀을 듣는 이유가 하나님 앞에서 죄로 죽게 된 내 모습을 발견하려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날마다 하나님 말씀이 나를 겨냥하고 나를 공략하는 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성막의 번제단을 보면서 우리는 바울의 다음과 같은 고백을 심비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24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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