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교회 역사 이야기<10>] 교회 공동체, 점점 제도에 얽매여가다

등록날짜 [ 2011-07-12 13:04:03 ]

초기 수도사들은 사회에서 완전히 벗어나려고 노력
이후 복음 전파로 부흥했으나 점차 제도 속에 갇혀

사막의 수도사들
크리스천들은 육체적 쾌락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늘 존경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안토니라는 사막의 수도사에 관한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이 전기는 오늘날 베스트셀러처럼 고대 크리스천들에게 인기를 얻었고, 사막은 교회가 정치권력과 연합하는 것을 못 마땅히 여기는 크리스천들의 도피처가 되었다.

사막의 수도사들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량의 음식만 먹으며 청빈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사막에서 오랫동안 혼자 생활한 많은 수도사가 끔찍한 환각을 경험하거나 주체할 수 없는 성적 충동에 시달리기도 했다.

몇몇 수도사들은 창세기 2장 18절 이면에 있는 진리를 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혼자 살게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는 진리였다. 그래서 그들은 ‘수도원’(수도사들의 공동체)을 설립했다. 그에 앞서 여성들은 이미 나름대로 신앙 공동체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이런 여성 공동체를 ‘수녀원’(라틴어로 ‘모이는 장소’라는 뜻)이라고 불렀다.

어떤 여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묵상의 삶으로 부르신다고 깨달아 수녀원으로 들어갔고, 어떤 여성들은 결혼 강요를 피해 수녀원에 들어갔다. 또 어떤 여성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수녀원에 들어가기도 했다. 결혼 비용을 지출하지 않으려고 딸을 강제로 수녀원에 보내는 아버지도 있었기 때문이다.

수도사 제롬과 그의 여인 파울라
아마 가장 흥미로운 수도사는 죄책감에 시달렸던 제롬(Jerome, 사진)이라는 크리스천이었을 것이다. 제롬은 사막으로 은둔하기 전, 이교 저자들의 저작에 탄복했던 자신의 모습을 무척 부끄럽게 여겼으며, 사막으로 은둔한 이후에는 로마 무희(舞姬)들에 대한 기억과 싸웠다.

육체적인 모든 것을 혐오한 제롬은 유별난 습관과 가르침에 이른다. 제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자기 몸을 씻어주셨다고 주장하면서 일평생 몸을 씻지 않았다. 그러나 육체적인 욕망에서 영원히 도망칠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것을 없애기 위한 최후의 노력으로 히브리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2년 동안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하나님께서 그를 혼자 살게 부르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로마로 돌아갔다. 로마의 감독은 그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을 매력적인 계획을 제안했다. 그 계획이란 믿을 만한 라틴어 성경을 번역하자는 것이었다.

번역은 마르켈라라고 하는 부유한 로마인 과부가 재정적으로 후원했다. 마르켈라는 일평생 수절하기로 서약한 실력 있는 성경학자였다. 제롬은 자신이 로마를 떠난 후에라도, 뜻이 명확하지 않은 성경구절을 놓고 고심하는 목회자들이 있다면 마르켈라에게 질문할 것을 권유했다.

제롬은 마르켈라의 호화로운 저택에서 장차 그의 가장 가까운 동반자가 될 사람, 파울라라는 여자를 만났다. 마르켈라와 파울라 역시 제롬과 마찬가지로 목욕을 거부할 정도의 극단적인 ‘자기 부인’의 생활양식을 받아들인 사람들이었다.

제롬은 파울라를 만난 뒤, 그녀야말로 자신의 희망과 두려움, 질문과 꿈에 대해서 함께 토론할 사람이라고 느꼈다. 파울라는 남달리 총명하여 제롬의 히브리어 실력을 곧 따라잡았다.

405년, 제롬은 신구약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22년 만에 완료했다. 그러나 제롬의 마음은 기쁨과 감격 대신 슬픔으로 가득했다. 그가 작업을 끝내기 몇 개월 전에 파울라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제롬은 이후 15년을 더 살다가 420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것이 과연 건강한 성장이었나
AD 300~400년 사이 크리스천들은 이전에 없던 평화와 힘을 소유했고, 덕분에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급속히 성장했다. 그러나 이 모든 성장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양보다 질을 우선하기 때문이다.

모든 이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당시 교회에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이라는 또 다른 신의 호의를 얻어 영적 안전성을 확보하려는 자들, 사회적 지위를 견고히 하려는 목적으로 입교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어떤 신자들은 교회가 새로운 위상을 확보하는 일에 저항하다 유배당했고, 또 다른 신자들은 사막에서 은둔했다.

그렇지만 크리스천 대부분은 세상의 인정 혹은 용인(容認)을 반겼다. 그 결과 많은 신자가 교회를 ‘보이지 않는 신자들의 공동체’와 동일시하지 않고 세상의 제도와 동일시하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교회의 제도적 측면을 지나칠 정도로 중요하게 취급했고, 복음은 상대적으로 흐려졌다.

개인의 삶을 변하게 하는 것이 대중들을 광대한 제도 속으로 편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지 않을까? 개인이 변할 때 점차 사회 전체에도 변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 하나님은 거대한 조직이나 강력한 국가의 도움이 있어야만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그런 분이 절대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일하신다. 인간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강하심이  모든 세상에 드러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24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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