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1-08-30 19:22:21 ]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의 사랑’을 알게 하고
그 사랑에 젖어 신앙생활 할 수 있게 만들어야
교회학교 교사를 세운 목적은 학생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게 하되, 구체적으로 무엇을 알게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교사가 가장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향한 사랑의 심정이 무엇인지 알게 해야 합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감시를 받게 가르쳐라
요한복음에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4:24)고 했습니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 눈에 안 보이나, 그분은 틀림없이 계시다, 그래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만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학생들이 확증할 수 있게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하나님의 감시를 받으며 살게 해야 합니다. 어디 가서 무엇을 하든지 그들의 양심과 행동을 다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을 인식하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 사실이 학생들에게 확실히 심기면, 학생들은 말씀에서 벗어나거나 함부로 살지 못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사 자신도 하나님의 감시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교사가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겠습니까? 교사가 먼저 영이신 하나님을 인식하고 학생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를 깨닫게 가르쳐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다는 것은 곧 하나님 자신을 공개하신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실 때에 말씀으로 나타내셨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살리는 것은 영이니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말씀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압니다. 곧 영과 말씀과 하나님은 동격입니다. 이처럼 말씀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면, 그 말씀이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리기 위해서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 사건이라든지, 출애굽 사건이라든지, 욥의 가정에서 일어난 사건 등 성경 속 모든 사건이 결국은 ‘나’를 깨닫게 하고자 기록한 것입니다.
‘아, 그들이 죄를 저지른 것처럼 나도 하나님 앞에 참으로 큰 죄를 저지른 죄인이구나! 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니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요, 나는 죄인이로구나’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고, 그 가르침으로 진단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죄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더욱이‘죗값은 사망’이라고 했으니 자신의 죽을 처지까지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인간의 불의가 드러납니다. 빛이 올 때 어둠이 드러나고, 참이 올 때 거짓이 드러나고, 생명이 올 때 사망이 드러나듯이, 정반대의 것이 드러납니다. ‘아,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이구나, 선하신 분이구나, 사랑이 많으신 분이구나, 능력 있는 분이구나, 그런데 나는 그분 앞에 망하게 되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으로 ‘내가 하나님 앞에 죗값으로 영원한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없는데 나 대신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이려 보내셨구나!’ 하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은 우리 인간에게 기막힌 사랑의 편지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을 안 보낸다고 우리가 그분을 원망할 수 있습니까? 죄인을 지옥에 보낸다고 우리가 원망할 수 있습니까? 아들을 안 보낸다고 해서 우리가 대들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언제 ‘내가 죽어야 할 대신 아들을 보내주셔야 합니다’ 하고 하나님께 청구서를 낸 적 있습니까? 우리가 죽게 된 사정을 하나님께서 먼저 아시고, 그 해결책으로 하나뿐인 독생자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그 사랑을 가르쳐라
내가 죽어야 할 대신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서 대신 죽는 순간에 나는 죄에서 자유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애원이나 사정이 아니라 권리입니다. 이런 권리를 우리에게 부여하시려고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 아들을 피조물인 인간들 앞에서 잔인하게 죽이셨습니다. ‘이것이 너를 향한 사랑’이라는 것을 말이 아닌 체험으로 학생들에게 가르쳐 배우게 한다면, 그 하나님 앞에 압도당하지 않겠습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께서 어떻게 기도하셨습니까?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자기 손으로 흙을 빚고 생기를 불어넣어 만든 피조물이 죽는 일과 아들이 죽는 일을 비교해 볼 때, 우리 처지에서는 우리가 죽는 것이 문제지만 하나님이 볼 때는 아들이 죽는 일이 큰일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죽는 큰일을 무시하고 우리를 살리는 일을 선택하신 이 사랑의 심정을 교사가 먼저 만나야 합니다. 만나면 참으로 감당할 수 없는 눈물, 고마움의 눈물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학생들에게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심정을 전달해 주어야 합니다. 이 하나님을 알고 성령으로 자기 심령에 모시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학생들과의 관계를 바로 갖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학교에서 교사가 해야 할 일이며, 교사를 세운 목적입니다.
<계속>
※2001년 7월 윤석전 목사 <교사세미나> 강의 중 발췌
위 글은 교회신문 <255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