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1-10-04 11:41:12 ]
안셀름·토마스 아퀴나스 등 대표 신학자들 등장
실제적 체험과 논리가 점점 어긋나기 시작하다
중세 초기 시민에게는 지식보다 생존이 더 큰 관심사였지만, 1100년대 후반에 들어 유럽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자 사람들은 점차 교육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런 움직임이 일자 상인, 탁발수도사와 더불어 학자들이 유럽을 종횡으로 다니기 시작했다. 많은 학자가 이 마을 저 마을로 다니며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많은 도시에서 학자들이 전도유망한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다. 그런데 탁발수도사들과 신비주의자들이 실제적 체험을 강조했지만, 학자들은 이성(理性)의 빛으로 체험을 조명하라고 시민에게 촉구했다. 그러나 이성이 인간의 체험과 함께 어울릴 수 있을까? 이성이 하나님과 함께 일할 수 있을까? 새로운 사상가들, 즉 스콜라 철학자들이 풀어야 할 과제가 바로 그것이었다.
유배된 스콜라 철학 시조(始祖) 안셀름
1093년, 프랑스 노르망디에 있는 수도원장이 영국 캔터베리 대주교가 됐다. 그의 이름은 안셀름(Anselm)이었다. 안셀름은 자신이 프랑스 국왕과 곧 충돌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프랑스 국왕 윌리엄 2세가 영국 교회를 통제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셀름은 윌리엄 2세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생애 3분의 1을 유배지에서 보내야만 했다. 그는 유배당하기 전에도 그랬지만 유배지에서 많은 책을 저술했다. 그 저작들로 그는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았다.
1000년 즈음, 몇몇 크리스천 학자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가 하나님이 인간의 논리와 모순될 수 있다는 것을 믿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네모난 원을 만들 수 있으며, 과거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안셀름은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행위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고 확언했지만, 하나님께서 논리와 모순된다는 점은 부인했다. 그는 “주님을 믿기 위해 주님을 이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주님을 이해하기 위해 믿을 뿐입니다” 하고 기도했다. 안셀름은 자신의 신앙을 확증하고자 하나님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증명했다. 이를 ‘존재론적 증명’이라고 한다.
또 안셀름은 인정 넘치는 크리스천이었다. 한번은 어떤 수도원장이 “저희 수도원에 있는 소년들 때문에 골치가 아픕니다. 아무리 매질을 해도 나쁜 행실을 고치지 않으니 큰일입니다” 하고 볼멘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러자 안셀름이 “나무를 심어놓고 사방을 꽉 막아두면 나무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물론 자라지 못하겠지요.” 수도원장이 대답했다. 그러자 안셀름이 이렇게 충고했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지금 소년들을 꽉 막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사랑으로 대하지 않는다면 아이들의 생각은 꼬일 것입니다.”
교회의 박사 토마스 아퀴나스
“뚱보, 멍청이, 얼간이!”
남에게 이런 말을 듣는 사람은 정말 가슴이 아플 것이다. 그러나 교회사 모든 인물을 통틀어도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보다 더 많이 조롱을 받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토마스는 조용하고 내성적이고 몸집이 뚱뚱한 아이였다. 그 뚱뚱한 아이는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도미니크 수도회에 들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토마스의 부모는 다른 계획이 있었다. 그들은 아들을 정처 없이 떠도는 설교자가 아니라 대주교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래서 형들을 시켜 납치 후 15개월 동안 여자를 붙여주기도 하고 제법 구미가 당길 만한 직위를 제안하며 유혹해 보았지만, 토마스는 요지부동이었다.
1245년, 토마스는 가족들이 사는 도시를 빠져나와 파리 대학에 들어갔다. 당시 대학생들은 욕설이나 비방하는 말을 좀처럼 입에 담지 않았다. 그러나 토마스의 친구들은 예외였다. 그들은 내성적인 성격에 유난히 수줍음을 많이 타는 이 도미니크 추종자를 ‘바보’라고 불렀다. 하지만 누구도 소처럼 웅얼거리는 이 바보가 전 세계에 이름을 떨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11년 후, 토마스 아퀴나스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의 가르침은 기독교 신학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이교(異敎) 철학자의 사상을 통합했다. 당시 많은 수도사가 철학과 물질세계를 사단의 영역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토마스에게 철학과 물질세계는 창조주를 가리키는 표지(標識)로 꽉 들어찬 보고(寶庫)였다.
1266년, 토마스 아퀴나스는 걸작 『신학대전』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그는 7년 동안 온 힘을 쏟아 저술에 전념했다. 이 역작은 무려 4천 쪽에 달했다. 그래도 그는 저술을 마무리하지 않고 계속 써나갔다.
1273년 12월 6일, 토마스는 주의 만찬에 참석했다. 그런데 거기서 어떤 일이 일어났다. 그는 주의 만찬을 마치고 나오면서 “내가 지금까지 기록한 것은, 내가 지금까지 본 것들과 주께서 내게 계시하신 것에 비하면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는다!” 하고 선언한 뒤 단 한 글자도 쓰지 않았다. 그리고 3개월 후 그는 세상을 떠났다.
1567년, 로마 가톨릭교회는 공식적으로 그를 ‘존경받아 마땅한 교사(박사)’라고 선포했다.
토마스 아퀴나스
위 글은 교회신문 <260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