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자격에 대해<34>] 하나님의 심정을 그대로 전달하라

등록날짜 [ 2011-09-21 11:08:03 ]

학생들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아들 예수
하나님 아버지의 그 절절한 사랑 전달해 전해주어야

하나님께서 교회학교 교사를 세우신 또 하나의 목적은 성경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인 성경을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는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제대로 알게 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 비유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탕자 비유를 기록하게 하셨을까요? 우리가 탕자와 같은 그런 처참한 지경이 되기 전에 빨리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기까지 나를 살리고 싶고, 우리 학생들을 살리고 싶으니 어서 깨닫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가르치면서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진실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교사는 그런 하나님의 진실을 잘 보존했다가 학생들에게 그대로 전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사가 하나님 심정을 품고 있지 않으니까 학생들을 위해 기도하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주일에 공과공부를 가르쳤다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정이 있는 교사는 학생들 때문에 울고 금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오죽하면 아들을 주셔서 죽게 하셨겠습니까? 아들을 죽이신 하나님의 심정을 안다면, 학생들이 세상에 빠져 죄짓고 멸망하는 것을 방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죽을 각오로 학생들을 살리려고 몸부림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왜 학생들의 심령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성경을 가르친다고 하면서도 교사가 하나님의 심정을 학생들에게 전달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사건은 그 교사에게서 중단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교사를 통해서 자기 마음을 학생들에게 전해 주려 했으나 전달되지 않았다면, 그 교사가 하나님 앞에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목사인 저도 설교할 때마다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심정을 성도들에게 전달하려고 전력을 다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신학을 공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정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심정이 내게 요동치게 하고, 일하시게 해야 합니다.

제가 굶주려 죽어가는 이를 살리려고 누구에게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급히 이 돈을 전해 굶어 죽지 않게 해라.” 그런데 심부름하는 사람이 놀면서 느릿느릿 가는 바람에 그만 그 사람이 굶어 죽어버렸습니다. 심부름 시키는 사람의 심정을 알지 못해서 그런 일이 생겼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제시간에 전하긴 했지만, 심부름 시키는 제 심정은 전하지 않고 그냥 돈만 주고 왔습니다. 어떤 심정으로 그 돈을 주었는지, 또 그 돈을 마련하려고 어떤 애를 썼는지 전혀 전하지 않았습니다. 심부름을 시킨 사람의 심정을 제대로 전해주어야 받는 이가 고마움을 알고 그에 상응하는 값진 삶으로 보답할 것 아닙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설교나 성경공부는 하나님의 심정을 진실하게 그대로 전해주어야 합니다.

장관들이 대통령의 심정을 살피지 못하면 국가 운영에 상당한 부조화와 어려움이 생깁니다. 교회에서도 교역자들이 담임목사의 심정을 모르면 엉뚱한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께서 교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학생들에게 전달하려 하실 때도 하나님의 심정을 그대로 전해야 하는데, 왜 하나님 심정은 간 곳 없고 엉뚱하게 교사의 생각, 교사의 지식을 전달합니까?

지금 당장 사람이 굶어 죽을 지경이라서 먹을 것을 주라고 했더니, “아, 젊은 애가 며칠 굶었다고 죽기야 하겠어요. 빌어먹든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요” 하고 주지 않아서 그가 죽어버렸다면, 그것은 자신의 지식으로 주라고 말씀하신 분의 생각을 가로막은 것입니다. 먹을 것을 주지 않은 것은 내 지식입니다. 학생들에게 하나님의 진실한 은혜, 구원, 믿음 이것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죽이기까지 전해주고 싶은 이 마음을 꼭 전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교사로서 이렇게 전해주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심정을 자기 몸으로 그대로 전해주신 분입니다.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분이나 자기를 낮춰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인류를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을 그대로 이루어 드렸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제자들도 하나님의 심정을 그대로 전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변했는지 그 심정의 전달이 중단됐습니다. 그리고 엉뚱한 것이 나타났습니다. “독일 신학자 칸트는 말하기를…” 칸트가 말한 것으로 죄 사함을 받습니까, 영생을 얻습니까? 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고 해야 할 것을 “칼 바르트는 말하기를”이라고 하느냐는 말입니다. 진실하게 보태지도 빼지도 말고 자기 아들을 주신 그분처럼, 나도 순수하게 그 아들을 전해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칸트가 가로막고 나옵니까? 왜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말로 바뀌어 구속의 은총이 인간의 도덕과 윤리로 바뀝니까? 어디서부터 끊어졌는지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내가 어디서 끊어져 누구에게서 이어져 오는가를 말입니다.

예수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에게서 나온 가지면 예수가 나와야지 왜 엉뚱한 것이 나옵니까? 학생들이 와서 듣고, 믿고, 그 힘으로 살아야 할 예수는 간 곳 없고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을 주니, 하나님이 주시는 것과 교사가 주는 것이 다를 때 그 교사가 나쁜 사람 아닙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그대로 전달해야지 왜 다른 것을 전달합니까? 말씀의 전달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그대로 전해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계속>
2001년 7월 윤석전 목사의 <교사세미나> 중 발췌

위 글은 교회신문 <25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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