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1-12-20 17:06:56 ]
‘천 대의 복’은 순종에서 시작
주님을 인정하는 믿음 가져야
성경에 복 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즉각 순종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고 하실 때 아브라함이 즉각 순종했습니다.
요즘 성도 같으면 아마도 하나님께 이렇게 반문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갈대아 우르 우상의 도시에서 고생을 많이 했는데 앞으로 하나님 말씀을 듣고 따라가면 얼마나 잘 살게 해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갈 목적지가 어디입니까? 기본적으로 이 두 가지는 가르쳐 주셔야 따라갈지 말지를 결정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무 말 없이 하나님의 생각에 그냥 동의하고 따라갔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나이가 많아 자손을 바랄 수 없는 중에도 장차 큰 민족을 이루는 복, 땅의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복 받는 큰 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이런 큰 복을 받기 원하거든 하나님 말씀에 조건 없이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는 취사선택(取捨選擇)의 여지가 없습니다. 목사가 기도한 후에 성령의 감동으로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도 취사선택의 여지가 없어야 합니다. 그냥 ‘아멘’ 하며 순종해야 합니다. 예물 드리라면 예물 드리고, 기도하라면 기도하고, 충성하라면 충성하고, 전도하라면 전도하며 영혼의 때를 위하여 자기 육신을 써버려야 합니다. 자기 영혼의 때를 생각하지 않고 알량한 육신을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꼭 갚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자신이 하신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에게 반드시 책임지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압도돼서 나의 건방진 생각을 취소하고, 나의 똑똑함을 무너뜨리고, 전능자의 말씀에 조건 없이 복종하는 것만이 하나님께 나를 책임지시게 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조건 없이 따라가라
성경에 보면, 주님이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송장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요11:4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순간에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송장이 생기를 얻어 벌떡 일어났습니다. 또 풍랑이 흉흉한 바다에서 “바람아 바다야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자, 인격 없는 바람과 바다가 그 목소리를 듣고 잔잔해졌습니다(마4:39).
“귀신아 떠나가라”고 말씀하실 때 귀신도 무서워서 벌벌 떨고 떠나갔습니다. 이처럼 송장도, 바람과 바다도, 귀신도 주님의 목소리를 거부하지 않고 목소리가 들려오는 현장에서 순종했거늘, 하물며 주님이 피 흘려 사신 교회의 직분자가 주의 종을 통해 들려오는 주님의 목소리 앞에 어찌 거부할 용기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직분을 맡아 놓고 주님의 목소리에 불순종합니까? 교회 직분자가 악한 영보다 못하고, 바람과 바다보다 못하고, 송장만도 못하단 말입니까?
죽은 사람 옆에서는 떠들어대도 전혀 반응이 없습니다. 공동묘지에 가서 “일어나라” 하고 아무리 소리 질러도 한 명도 안 일어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어서 그렇습니다.
교회에서 아무리 주의 종의 입술을 통해서 하나님의 목소리를 전해줘도 듣지 않는 것은 죽어서 그렇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된 송장도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났는데, 강단에서 아무리 주님의 명령을 전해도 안 듣는 자는 송장만도 못한 자가 아니겠습니까? 그러고서도 자기가 살았다고 의기양양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숨 쉬는 목숨이 붙어 있을 뿐, 영적으로는 이미 죽은 자들입니다. 살아 있다면 왜 살아 있는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죽어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직분을 가지고 있다면, 그 교회가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산 자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어야
교회 직분자는 무엇보다 먼저 주의 종을 통해 들려오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귀가 열려 있어야 합니다. 요한 사도는 요한계시록에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또 말세를 살아가는 오늘날 교회들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계2:29, 2:11, 2:7, 2:17, 3:6, 3:13, 3:22). 이 말은 성령의 목소리를 듣기만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말씀을 듣고 즉각 움직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움직인 자는 살고, 움직이지 않은 자에게는 멸망이 온 사건들을 기록했습니다. 천지창조(天地創造)는 하나님의 목소리 앞에 천지 만물이 생겨난 웅장한 대사건입니다.
선악과 사건은 아담이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을 때 정녕 죽음이 온 사건입니다. 노아가 “배를 지어라”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움직였을 때 온 인류가 홍수로 멸망해도 그의 여덟 식구는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움직일 때는 살았으나 움직이지 않은 자는 모두 멸망했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 가지고 그렇게 주의 종을 통해 전하는 하나님 말씀을 안 듣고, 오히려 주의 종에게 덤비고, 대적하고, 교회에서 자기 마음대로 하고, 기분 나쁘면 “아이고, 기분 나빠서 교회 못 가겠다”고 말합니까? 이런 사람들은 말로만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하지, 진짜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천국과 지옥이 확실히 있다고 믿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확실히 믿는 사람들은 지옥이 두렵고 하나님이 두려워서 절대 함부로 못 삽니다. 그런데 자기 감정대로 교회 다니는 이 사람들이 무슨 천국을 알고, 지옥을 아는 사람들입니까? 오늘날 교회 직분자라고 하면서도 신앙생활 하는 것을 보면, 천국과 지옥이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혹시 천국이 있다면 가고, 없으면 할 수 없다’는 식입니다. 당신도 그에 속하지 않습니까? (계속)
※윤석전 목사 ‘직분자세미나’ 중 발췌.
위 글은 교회신문 <270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