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분자의 자세와 역할(11)] ‘집사’의 바른 의미에 대해

등록날짜 [ 2012-02-21 09:53:23 ]

집안 살림을 맡은 하인이라는 의미로서
주의 일에 오직 ‘예’ 하는 자세 갖춰야

집사(執事)라는 명칭은 교회에서 권사나 장로, 안수집사를 포함한 직분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집사라는 말은 교회에서보다 일반사회에서 먼저 사용했다. 옛날부터 주인 가까이 있으면서 그 집일을 맡아보는 사람을 집사(執事)라고 불렀다.

집사는 그 집 전체 일을 주인의 지시에 따라, 주인이 가장 기쁘도록, 주인에게 유익이 되게 맡아보는 사람이다. 집사는 주인을 월권(越權) 하거나 주인의 명령에 불순종하거나, 주인의 의사에 반하게 일을 처리하면 그날로 해고되고 만다.

집사라는 의미의 큰 뜻
교회에서 쓰는 집사라는 말은 디아코노스(diakonos) 즉 종, 수종자, 섬기는 자라는 의미다. 오늘날 교회에서 집사, 권사, 장로가 모두 집사다. 넓게 보면, 목사도 성도의 영혼을 맡은 하나님의 집사에 해당한다.

그런데 목사는 양을 친다고 해서 목자(牧者)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집사인 목사가 성도에게 욕을 먹어도, 자존심이 상해도, 때로 굴욕을 당하면서도 성도를 붙들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귀한 직분이기에 그 직분에 목숨을 바치려는 것이다. 성도보다 못나서가 아니라, 오직 주인의 즐거움을 위해서, 주인이 기뻐하는 대로 일하려고 참고 견디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도 죽는 직분을 갖고 이 땅에 와서 ‘나는 목숨을 버리러 왔노라. 나는 죽으러 왔노라’고 했다(마20:28). 우리의 직분은 오직 나를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명령 앞에 죽는 직분이다. 하나님이 아무에게나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직분에 임명되지 않은 자에게는 ‘죽도록 충성하라’고 할 이유가 없다. 무슨 직분으로 죽도록 충성하겠는가.

그러니 최소한 직분을 받은 자는 주님께 목숨을 요구받은 자라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내 목숨을 주님 앞에 충성하는 일에 소모품으로 써버릴 각오가 돼 있는 사람이 직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오직 직분을 수행함에 있어 하나님의 명령을 받으려고 온 힘을 기울인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 직분자들은 이런 귀한 직분을 가지고 오히려 얼마나 주의 종의 속을 썩이는가? 어떤 직분자는 “아니, 주의 일을 왜 목사님 마음대로 하십니까?” 하고 말한다. 이 사람은 교회 일을 자기와 상의해서 결정하기를 바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21장에 뭐라고 했는가. 베드로가 요한을 가리켜며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하고 묻자 주님께서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고 하셨다. 주님의 속뜻은 “다 내 권한에 있는 것을 왜 묻느냐? 너는 그런 것 묻지 말고 내 양이나 잘 먹이고 잘 치라”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직분을 받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우리의 권한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권한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직분자가 교회를, 주의 종을 자기 권한에 두고 휘두르려고 하는가?

집사(執事)라는 뜻인 ‘디아코노스’라는 말 속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하인, 둘째 사환, 셋째 섬기는 자, 넷째 종이나 일꾼, 다섯째 사역자, 여섯째 청지기라는 뜻이다. 그래서 ‘디아코노스’ 즉, ‘집사’ 하면 ‘하인, 사환, 섬기는 자, 종이나 일꾼, 사역자, 청지기’라는 뜻이다.

이 여섯 가지 의미 중에 어디에 직분자가 자기 권한을 부리는 데가 있는가? 성경 어디에 직분자가 교회를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고, 자기 마음대로 이끌고, 목사에게 대들고 건의할 권한이 어디 디아코노스라는 말 속에 있는가? 단 한 군데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명령에 ‘아니오’는 없다
성경은 집사를 일꾼이라고 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뵈뵈를 겐그리아 교회의 일꾼이라고 소개했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롬16:1). 사도 바울은 겐그레아 교회 여집사인 뵈뵈에게 목숨이 경각에 달릴 위험한 일을 시켰다. 뵈뵈에게 자신이 쓴 서신을 로마교회에 전달하게 한 것이다.
 
그 당시 예수 믿는 도에 관한 내용이 담긴 서신을 전하다가 발각되는 날이면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뵈뵈는 겐그리아 지방에서 어느 정도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여인이었다. 그럼에도 뵈뵈는 바울이 쓴 서신을 로마교회에 전달하는 일이 하나님 일인 줄 믿었기에 사도의 명령 앞에 목숨을 내놓고 출발한 것이다.

성경에는 단 한 마디도 뵈뵈가 사도 바울의 명령에 거부했다는 흔적이 나오지 않는다. 그 어려운 일을 시행하면서 단 한 마디도 핑계나 이유를 달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명령을 하시든지 단 한마디도 이유를 달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직분자는 자기 자신의 신분을 알아야 한다. 내가 왜 장로가 되고, 내가 왜 권사가 되고, 내가 왜 집사가 되고, 내가 왜 교사가 되었는지를 잘 알아야 한다.

당신이 직분자로서 평생 한 일이 무엇인가? 무슨 유익이 있었는가? 거룩한 직분을 가지고 죽을 짓만 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직분이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에 내 영혼의 기업이 되어야지, 그렇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 있는가? 직분을 받은 자가 교회에서 특별히 하는 일이 없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한 가정의 살림살이를 도맡은 집사(執事)도 그 집 모든 사정을 알아야 집사 직분을 잘할 수 있다. 그런데 하물며 교회 집사 직분자로서 하나님의 일을 맡으려면 하나님의 사정을 내 집안일보다 더 잘 알아야 한다. 교회의 사정을 내 집안일보다 더 자세히 알아야 한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고 직분을 맡아서 하나님의 일을 훼방한다면 주님 오실 때 어찌하겠는가? <계속>

※윤석전 목사 ‘직분자세미나’ 중 발췌.

위 글은 교회신문 <27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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