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분자의 자세와 역할(15)] ‘무익한 종’이라는 하인의 자세로 충성해야

등록날짜 [ 2012-03-20 15:51:07 ]

유익을 남겨야하는 달란트처럼  
주님 심정으로 최선을 다하며
믿음으로 아름다운 지위를 얻자

누가복음 17장 7~10절에는 하인이 어떤 자세로 주인을 섬겨야 하는지 잘 설명해놓았습니다.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찌니라”

하인은 온종일 땡볕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죽도록 일하고 집에 돌아와서도 피곤한 몸을 쉴 수 없습니다. 곧바로 주인의 식사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하인이 일할 동안 온종일 뒷짐만 지고 있었으면서도 또 식사준비를 하라고 시킵니다. 이처럼 주인이 어떤 무리한 일을 시켜도 거절할 수 없는 것이 하인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하인인 직분자는 목사가 조금만 일을 시키면 “목사님은 남의 사정도 모르고 저렇게 생짜로 사람을 부려 먹으려고 든다니까!” 하며 불평불만이 대단합니다. 주인은 하인의 사정을 알 필요가 없습니다.

직분자가 교회에서 자기 사정을 알아주기 바란다면, 그는 이미 하인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사정에 따라 하인인 직분자를 쓸 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도 순종했건만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사정에 따라 사정없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데 쓰셨습니다.

주님도 제자들의 사정을 보지 않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 인류를 구원하는 일에 그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고, 껍질을 벗겨서 죽이고, 불에 태워서 죽이고, 사지를 찢어서 죽이기까지 그들을 쓰셨습니다. 그런데 교회 하인인 직분자가 자기의 사정을 들고 나선다면, 그는 직분에 사표를 내야 합니다.

성경에 자기 사정을 들고 나온 자는 모두 다 버림받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 직분자는 하인인 직분자의 자세를 잘 모르고 직분을 받아 그 직분으로 세력을 과시하려고 하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렇게 세력을 부렸다가는 분명하게 망한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데도 말입니다.

심지어 어떤 장로는 예배 시간에 맨 앞에 앉아서 목사가 설교를 조금만 길게 하면 빨리 끝내라고 헛기침까지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불학 무식한 월권행위입니까?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설교를 얼마나 길게 했는지 유두고 라는 청년이 창문에 걸터앉아 졸면서 설교를 듣다가 떨어져서 죽었는데 사도 바울이 그를 살려놓고 다시 설교했습니다. 주의 종의 설교에 이렇다저렇다 말하는 것은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목소리를 들을 귀가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설교가 하나님께서 주의 종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믿습니까? 그렇다면 설교가 길든 짧든 하나님께 시비하고 대들려는 작태를 버리십시오. 하인은 주인에게 시비하고 대드는 자가 아닙니다. 오직 주인에게 복종하고, 순종하고, 주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대로 살기로 한 자입니다.

맹종하지 말고 의미 알아 복종하라
직분자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악천후일지라도, 자신의 육체가 만신창이가 될지라도, 자신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시킬지라도 하나님이 시키시면 이유나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강단에서 선포하는 주의 종의 말에 순종할 때,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 말은 맹종(盲從)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옳은 줄로 알고 복종하라는 말입니다. 이럴 때 자기 믿음이 성장하고, 주님 나라에 상급의 이력, 면류관의 이력이 계속 쌓이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 13절에 ‘디아코노스’ 즉 하인의 직분을 맡아 수고한 사람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큰 담력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심정을 모르면 절대 하인 노릇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각각 종들에게 줬다고 말했습니다. 주기만 했지 주인이 무엇을 하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자는 그 돈으로 장사해서 갑절로 유익을 남겨서 주인을 기쁘게 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자기 생각으로 묻어두었다가 저주를 받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직분은 주인의 심정을 미리 알고 헤아려서 유익을 남겨야 하는 달란트와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목사들도 직분을 주신 주님의 심정을 모른다면, 힘든 목회를 어떻게 계속하겠습니까? 때로는 앞뒤가 꽉 막힌 성도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때로는 성도들에게 온갖 굴욕을 당하니 누가 목사를 하고 싶겠습니까?

어떤 재정 담당 집사는 “우리 교회는 목사님에게 생활비를 얼마 준다”고 말합니다. 꼭 자기가 주는 것처럼 말합니다. 자기가 무슨 권한으로 목사의 생활비를 줍니까? 그런데 하나님 것을 직분자가 마음대로 줍니까? 목사는 하늘에서 파송한 자이기에 하나님의 것을 주의 일의 필요에 따라 목사 마음대로 쓸 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이 하나님의 것을 마음대로 쓰는데 누가 가로막습니까?

목사의 생활은 성도들의 생활과는 많이 다릅니다. 성도나 다른 교회 목회자를 도울 일이 수없이 많이 생깁니다. 목사 혼자만 알고 도와야 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니까 “목사님! 어디에 이 돈을 쓰려 하십니까?” 하고 묻지 마십시오. 목사는 누구를 만나도 빈손으로 만날 수 없습니다.

직분자는 주인에게 복종하는 하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월권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복받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28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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