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분자의 자세와 역할(17)] 죽도록 충성하는 믿음의 성도가 되자

등록날짜 [ 2012-04-11 16:29:56 ]

남이 알아주는 체면에 민감하면 주님 일 그르쳐
자기 의는 없고 오직 예수만 영광 받으시게 해야

직분자는 교회의 하인(下人)이 되어야 합니다. 하인은 아무리 힘든 일을 해도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하는 마음을 지닐 뿐, 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교회의 하인인 직분자가 보상 받으려는 심리가 없어야 주의 종이 마음대로 일꾼을 발탁해서 주의 일에 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 피아노를 잘 치는 성도가 새로 왔다고 합시다. 그러면 오랫동안 피아노를 치던 직분자는 새로 온 성도가 일하도록 자리를 양보해서 하나님의 일이 더욱 빛나게 해야 하인다운 자세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새로 온 성도에게 일을 맡기려 하면 오히려 오랫동안 일한 직분자가 자기를 무시했다며 자존심 상해하고, 기분 나빠하며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오랫동안 교회에서 일한 직분자가 무서워서 목사는 마음대로 능력 있는 일꾼을 발탁해서 쓰지를 못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오면 내가 일하던 자리에서 비켜나야 합니다. 10년 하던 일도 비켜나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보다 더 잘하는 사람을 세우면 시기질투가 가득해서, 그것을 “갈아치웠다”고 표현하고, “잘하나 두고 보자!” 고 말하면서 기어이 교회에서 빠져나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보상심리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자기가 그동안 얼마나 애썼는데 자기를 몰라주느냐고 하는 자기 의(義) 때문입니다. 하인에게는 이런 자기 의가 없어야 합니다. 디아코노스(diakonos), 즉 직분자는 이런 보상심리가 없고, 자기 의가 없이 겸손함으로 충성해야 합니다.

‘봉사’가 아니라 ‘충성’이다
요즘 교회에서 봉사(奉仕)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그런데 봉사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사용하기에 알맞지 않은 말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봉사라는 말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는 일은 봉사가 아니라 충성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봉사라는 말은, 저 사람과 나 사이에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이 그저 저 사람을 위해서 박애주의 정신으로 도와주는 것을 말합니다. 나는 아무개에게 물 한 그릇 얻어먹은 사실도 없고 양말 한 켤레 얻어 신은 사실이 없어도, 아무개가 어렵고 힘들 때 내가 그를 위해 애쓰고 수고하는 것이 봉사입니다.

국어사전에는 봉사라는 말을 ‘국가나 사회 또는 남을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힘을 바쳐 애씀’이라고 풀이해 놓았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단체 또는 국가에 바치는 수고는 봉사라는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앞에 하는 일은 봉사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죄로 말미암아 지옥에 갈 수밖에 없을 때 나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그 죗값을 갚아주셨습니다. 내가 병들어 고통받을 때 주님께서 대신 채찍에 맞으셔서 대신 아프시고 내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악한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달려들어 나를 삼키려 할 때마다 주님께서 성난 병사와 같이 마귀의 아가리에서 나를 끄집어내어 건져주셨습니다.

그러니 내가 주님 앞에 일하는 것은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그저 박애주의 정신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먼저 내게 사랑을 베푸셨으므로 그 은혜가 감사해서 고마움의 표시로 죽도록 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하는 일은 봉사라는 말을 쓰지 않고,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일한다는 뜻으로 ‘충성’이라는 말을 씁니다.

‘헌신’이 아니라 ‘감사’다
또 요즘 교회에서 ‘헌신(獻身) 예배드린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매 맞으시고, 피를 흘리셔서 나를 위해 고통당하심으로 헌신하셨지, 언제 우리가 주님께 헌신했습니까? 우리가 언제 주님을 위해 희생했습니까? 우리는 주님을 위해 아무리 목숨을 내놓고 죽은들 그것은 헌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희생이 아닙니다. 당연한 감사의 고백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가 감사해서, 내가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은혜가 감사해서 충성하는 것이 디아코노스, 즉 직분자의 자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사용하는 언어도 잘 가려서 써야 합니다.

봉사(奉仕)라는 말은 저 사람이 부족한데 내가 도와준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가 도와야 할 만큼 부족하신 분입니까? 우리는 지옥 갈 수밖에 없고, 멸망할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주님이 대신 죽으시고 우리를 죽음에서 살리셨으니, 그 은혜에 감사해서 충성하는 것입니다.

은혜 입은 자처럼 충성하자
충성(忠誠)에는 목숨을 내놓아도 봉사(奉仕)에는 목숨을 못 내놓습니다. 봉사한 사람들은 대접받기 원하고, 충성한 사람들은 누가 알까 봐 두려워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충성한 것을 남이 알아서 내가 높아지면 하늘에서 받을 상이 없어지고, 주님의 은혜 입은 자로서 면목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주님께 더 큰 은혜와 사랑을 받았는데 주를 위해 쥐꼬리만큼 일해 놓고 누가 알까 무섭습니다. 만약 주의 일을 봉사하는 마음으로 한다면, 그는 디아코노스는 아닙니다. 우리는 봉사가 아니라 충성하는 직분자가 되어야 합니다. 봉사하는 사람은 ‘내가 그래도 교회에서 이런 일을 했다’며 자기 의를 드러내고, 이것 때문에 보상심리가 나타나서 목사가 칭찬해주기를 바라고, 누가 자기를 드러내주기를 바랍니다.

이런 보상심리가 직분자 속에서 완전히 무너지고, 이제 죽도록 충성만 하는 믿음의 직분자, 하인의 정신을 지닌 직분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계속>      *윤석전 목사 ‘직분자세미나’ 중 일부 발췌

위 글은 교회신문 <28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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