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2-04-17 13:44:30 ]
절대 권력자 앞에 그저 쓰임받는 것에 감사하며
최후까지 순종하는 자세 후배들에게 보여주어야
직분자는 예수의 생애를 가진 자입니다. 예수의 생애를 가졌기에 지옥에서 나온 자입니다.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에 나병환자가 깨끗이 치료받았고, 송장이 살아났으며, 귀신이 떠나갔고, 풍랑이 잔잔해졌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아무도 거역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말 한마디에 인생의 생사화복이 달린 절대 권세자 예수의 하인이 바로 직분자입니다.
주인을 드러내고 죽어간 하인
요한이 요단 강에서 침례를 베푼다는 소문에 바리새인들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보내 요한에게 정체를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냐? 그리스도냐? 엘리야냐? 선지자냐?” 그러자 침례 요한이 대답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도 엘리야도 선지자도 아니다. 내 뒤에 오시는 이가 그리스도시다.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요한복음 1장 참조).
당시에 신들메를 풀어주고 발을 깨끗하게 씻어주는 일은 하인이 했습니다. 지금 요한은 예수 앞에 자기가 그런 하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쓰시는 디아코노스(Diakonos), 즉 하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요한을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침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1:11). 요한은 아브라함보다 큰 자요, 모세보다 큰 자요, 엘리야보다 큰 자요, 이 지구상 누구보다 큰 자라고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계시(啓示)로 태어나서 계시로 살다가 계시로 죽었습니다. 사람 중에 하나님의 계시로 태어나서 계시로 살다가 계시로 죽은 자는 요한 외에는 없습니다. 요한이 이렇게 큰 자임에도 예수 앞에서는 가장 작은 하인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예수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할 하인 중의 하인이라고 고백한 것은 겸손한 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대로 하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침례 요한은 어떤 일을 한 하인일까요? 요한이 요단 강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침례를 베풀고 있을 때, 예수께서 침례 받으러 나아오셨습니다. 요단 강 물속에서 두 사람이 만난 것입니다. 그때 요한의 입에서 커다란 외침이 터져 나왔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이종사촌 동생으로만 알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자기도 모르게 선포한 요한이 받은 충격은 실로 엄청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려 하시자 “내가 당신에게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하며 말립니다. 예수께서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하시자 요한은 예수의 하인이기에 그 명령 앞에 꼼짝 못하고 침례를 줍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물에서 나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예수 위에 임하시고 하늘에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이처럼 요한의 사명은 예수보다 앞서 와서 예수가 세상 죄를 담당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일이었습니다.
요단 강 침례사건으로 그 일을 만인 앞에 행하였으니, 요한은 자기의 임무를 완수한 것입니다. 더는 요한이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후 요한은 헤롯에게 잡혀가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예수의 하인인 침례 요한을 마지막으로 선지자는 끝이 났습니다. 구약시대 수많은 선지가가 오리라 외쳤던 예수가 왔고, 드디어 예수의 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요한은 목이 잘려 소반에 담기기까지 하인 노릇을 충실하게 했습니다. 만약 요한과 예수가 둘이 같이 사역한다면, 사람들이 누가 메시아인지 혼동했을 것입니다. 오직 예수만 드러내기 위해서, 주인을 드러내기 위해서 목이 잘려 죽고 만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은 목이 잘려 죽어도 주인을 드러내기까지 충성하는 자가 디아코노스, 하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직분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직분을 이용해 예수를 밟고, 강단을 짓밟고 자기들 마음대로 높아지려고 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들이 과연 하인일까요?
순교로 최후를 맞이한 예수의 하인들
베드로도 예수의 하인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에서 붙잡혀 죽게 되었을 때, 자기는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그냥 질 수 없다며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고 합니다.
사도 요한도 주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펄펄 끓는 기름 가마 속으로 내던져졌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살아나서 밧모 섬에 유배됐습니다. 낮과 밤의 일교차가 극심한 밧모 섬에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예수의 하인으로서 예수를 드러내고, 예수를 높이다가 죽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의 하인으로서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의 하인으로 사는 일에 목숨이라도 아끼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런데 직분자가 교회에서 믿음의 후배에게 보여 주는 것이 고작 교회를 내 맘대로 휘두르는 것입니까? 교회 재정을 자기 맘대로 써버리는 것입니까? 교회에서 목사를 자기 맘대로 내쫓는 것입니까? 정말 주님이 직분자에게 주신 사명, 즉 디아코노스다운 모습을 믿음의 후배에게 보여 주고, 후손에게 보여줘서 후손도 예수의 하인이 되게 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참다운 기독교인의 모습입니다. <계속> *윤석전 목사 ‘직분자세미나’ 중 일부 발췌
위 글은 교회신문 <285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