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분자의 자세와 역할(24)] 남의 죄를 대신 짊어질 자신이 있는가

등록날짜 [ 2012-05-29 10:34:51 ]

십자가는 누명을 써도 변명하지 않는 것
평생에 불명예가 된다 할지라도 짊어져야

하나님께서 직분자를 세우신 것은 교회와 성도를 섬기되 십자가를 지고 죽기까지 섬기라고 세우셨습니다.

엄청난 죄의 누명을 뒤집어써서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언제 죽을지 모르는 형편에 처해도 입을 열어 남의 죄를 드러내지 않고 그 죄로 죽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당하는 얄팍한 고통과 고난을 십자가라고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남의 죄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지은 죄로 당하는 고통을 십자가 지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께서 30년 동안 요셉의 집에서 목수 일을 도와가며 가난하게 사셨지만, 그것을 ‘십자가 지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 이 땅에서 온갖 고통과 수모를 당해도, 심지어 그를 죽이려고 돌을 들고 쫓아다니는 자가 있어도, 바리새인들이 책잡으려고 힐난하고 별짓을 다 했어도 이것을 ‘십자가 지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인간의 죄를 고의로 짊어지고 죄인 취급을 당할 그때부터 ‘십자가를 지셨다’고 말합니다.

어떤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가
하나님의 아들도 이처럼 우리의 죄와 허물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대신 십자가를 지고 죽기까지 섬겨주셨는데, 오늘날 교회에서 남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 지고 섬기는 직분자가 몇 명이나 있을까요? 오히려 직분이 높으면 높을수록 십자가를 벗으려 하지 않습니까? “항존직이 그런 누명을 쓰면 하나님 영광을 가리는 일 아닙니까?” 하며 빠져나가려 하지 않았습니까?

“사모님! 보셨죠? 내가 그런 일 하게 생겼습니까? 사모님이 내 증인 좀 되어 주세요. 내가 그 일 안 했다고 말씀 좀 해주세요!”

교회에서 사모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서 옳다 그르다 판단하게 하고 말로 ‘누가 옳으네 그르네’ 하며 싸울 때, 목회자 사모로서 얼마나 가슴 아프겠습니까? 다 똑같은 성도이니 누구 한 사람이 그 죄를 짊어지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니까 서로 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고난을 겪는다면, 그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지은 죄의 누명을 뒤집어쓰고 그 죄 때문에 고난을 겪는 것이 십자가 지는 것입니다.

창피스럽고 부끄러울수록 내가 해야
십자가를 지면 그 당사지만 불명예를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가족도 불명예를 당하고, 그를 아는 친구도 불명예를 당합니다. 그 한 사람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불명예를 당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불명예를 당할지라도 끝까지 죄를 벗으려 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수치와 천대와 멸시를 당하면서 상대방을 살리고자 하는 몸부림, 이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 십자가를 져 본 사실이 있습니까?

직분자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고 말씀하신 주님의 목소리를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자라야 장차 주님의 좌우편에 앉는 영광스러운 지위를 얻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기까지 섬기라고 세운 직분자가 십자가를 지려 하지 않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불명예를 당해 봤자 일평생밖에 더 당하겠습니까? 죄인 취급을 당해 봤자 일평생밖에 더 당하겠습니까? 내가 창피하고, 부끄러워 봤자 일평생밖에 더 당하겠습니까?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당시에는 어느 집안에 십자가형을 당한 사람이 있다면, 그 가족들이 성과 이름을 바꾸고 그 지역을 떠날 정도로 십자가형은 부끄럽고 수치스럽다 못해 저주스러운 형벌이었습니다. “저 집안사람 아무개가 십자가를 졌다더라” 하는 소문이 나는 순간에 어느 누구도 그 집안사람을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정도로 불명예를 당할지라도 입을 열지 않고 남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묵묵히 감당하는 이것이 직분자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어지간한 죄가 있다고 지는 것이 아닙니다. 찢어 죽여도 시원찮고, 껍질을 벗겨 죽여도 시원찮고, 목을 쳐서 죽여도 시원치 않고, 불로 태워 죽여도 시원치 않을 정도로 잔인한 고통을 가하고 싶은 죄인 중의 죄인 괴수를 죽이려고 고안한 것이 바로 십자가형입니다.

그래서 손과 발에 대못을 박아 육체 속에 온갖 아픔과 고통을 당하게 하고, 물과 피를 다 쏟아서 죽게 하는, 인간으로서는 가장 큰 고난을 가하는 것이 십자가형입니다. 우리는 남이 지은 죄의 누명을 쓸 때 여기까지 각오해야 합니다.

결국은 십자가 때문에 죽는 것이다
이처럼 십자가는 내 죄로 죽는 것이 아니라 남의 죄로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직분자라고 하면서, 교회 중직이라고 하면서 당신은 십자가를 져 본 사실이 있습니까? 교회에서도 “목사님이 하라고 해서 했잖아요?” 하면서, 목사를 불법자로 몰아세워 결국 목사를 내쫓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진정한 디아코노스, 직분자는 교회에서 누가 무슨 잘못을 했어도 “그 일은 제가 한 일입니다” 하고 십자가를 딱 져버리면, 더는 교회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진 그 직분자는 부끄럽고 창피하고 불명예를 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아시니 때가 되면 불명예를 다 벗겨 주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은 자는 마지막 날에 영광의 부활로 살려 주십니다.

이처럼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죄인 취급을 받고, 불명예를 당하고,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끝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죽음으로 마감하는 것입니다. 과연 당신은 교회 직분자로서 이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까?
<계속>  *윤석전 목사 ‘직분자세미나’ 중 일부 발췌.

위 글은 교회신문 <291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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