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2-06-05 19:33:55 ]
자신의 몸을 버려 온 인류 살리신 예수처럼
오직 영혼 살리는 정신으로 성도를 섬겨야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병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이 목숨을 내놓고 매 맞으실 때, 우리 인간의 병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를 만나는 사람은 어떤 불치병에서도 고침받았고 그 영혼은 생명을 얻습니다. 섬김 속에는 이처럼 생명이 살아납니다.
성경에서 ‘섬긴다’는 말은 세상 사람들처럼 박애주의로 섬긴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목숨으로 섬기시니 인류가 구원 받고, 교회에서 장로, 권사, 집사가 섬기니 수많은 영혼이 살아납니다. 섬김 뒤에는 반드시 살아나는 역사가 있습니다. 목사는 강단에서 땀 흘리며 설교해서 성도를 섬깁니다. 이 섬김을 받는 성도는 그 말씀으로 영혼이 살고, 사명이 불타서 직분을 감당하고, 예수의 생애를 재현합니다.
농부가 씨 뿌린 다음에 거름 주고 김매며 가꾸는 것은 가을에 열매라는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섬기는 것은 수많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섬김에는 꼭 생명이 살아나야 합니다. 그래서 섬김 받으려는 사람이 많은 교회는 부흥하지 않으나, 섬기는 사람이 많은 교회는 부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섬기는 교회, 살리는 교회에 영혼을 맡기십니다.
먼저 자기 영혼을 섬기라
섬기되 먼저 자신의 영혼을 섬기십시오. 자기 영혼을 섬기는 자는 새벽예배에 빠지지 않습니다. 저녁예배 때도 TV 시청하느라 빠지는 일이 없습니다. 삼일예배도 절대 다른 곳에 가지 않습니다. 자기 육체를 들고 와서 하나님 말씀을 듣습니다. 말씀은 내 영혼의 양식이요, 내 영혼을 살리는 능력이요, 내 영혼을 살리는 구원의 생명이기에 내 영혼부터 살려야 합니다.
목사는 성도의 영혼을 살리려고 강단에서 죄를 지적하고 끄집어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왜 목사님이 설교를 저렇게 해서 창피하게 하는지 모르겠네” 하고 불평합니다. 죄가 드러나서 부끄럽고 창피하고 불명예를 당할지라도 영혼은 해결해야 합니다. 성도 속에 있는 죄를 끄집어내는 것이 성도를 섬기는 목사의 일인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우리 목사님은 설교할 때마다 나만 때리시네” 하고 말합니다. 이 말은 설교를 들으니까 찔린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지은 죄가 드러나는 것이 부끄럽다면, 주님은 남의 죄를 짊어지고 죽었으니 얼마나 부끄러우셨겠습니까? 당신이 그렇게 부끄러워하는 그 죄를 주님이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도 짊어졌는데 무엇 때문에 그 죄를 부끄럽다고 숨겨놓습니까? 부끄럽다고 죄를 감추면, 목숨이 끝나는 순간에 그 죄가 당신의 영혼을 끌고 지옥으로 갑니다. 그러니 아무리 부끄러워도 죄를 끄집어내야 합니다. 아무리 부끄러워도 인생이 있을 때밖에 더 부끄럽겠습니까? 육신은 아무리 만신창이가 되고 불명예를 당해도 영혼은 부끄럽지 않도록 죄를 끌어내서 회개해야 합니다.
죄를 회개하는 것이 진정한 영혼의 섬김
장로라도 권사라도 죄를 짊어지고 거룩한 척해 봤자 소용없습니다. 당장은 부끄러움이 드러나지 않아도 육신이 마감할 때 영혼의 부끄러움이 드러나면 바깥 어두운 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갈아야 합니다.
또 어떤 권사는 “내가 이래 봬도 왜정시대에 대학 나온 사람이야” 하고 자랑합니다. 배운 자랑을 아무리 해 보았자 육신이 끝나면 그 모든 것이 물거품일 뿐입니다. 성경은 왜정시대에 대학 나와서 구원 받는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속에 있는 죄를 끄집어내고 회개하는 자가 구원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처럼 교회에서 제법 직분이 높다는 사람들일수록 죄를 숨겨놓고 누가 알까 봐 벌벌 떱니다. 사람은 아무도 몰라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죄가 드러나서 사람들이 아무리 당신에게 불명예를 안겨줘도 하나님은 이미 당신의 명예를 회복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 아들이 흘린 피 공로로 당신의 명예를 회복해 놓으셨습니다.
이 땅에서 육신이 있을 때 죄가 드러나야 당신 영혼의 명예가 회복됩니다. 죄가 드러나면 육신은 명예가 땅에 떨어지나, 영혼은 명예가 회복됩니다. 내 영혼의 명예를 회복하기 원하면, 죄를 내놓고 회개해야 합니다. 무슨 죄입니까? 섬기지 못한 죄를 끄집어내서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중직은 목숨을 버릴 만큼 섬겨야
하나님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섬기다가 죽었거든, 하물며 직분자가 하나님 앞에, 교회 앞에 섬김 받으려고 합니까? 하나님의 아들은 최고 중직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목숨을 버리고 섬기는 중직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 중직이면 중직일수록 주님과 같이 목숨을 버리고 섬기는 직분을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어떤 문제가 생길 때 섬기지 못하는 자는 “목사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손가락질합니다. 그러나 섬기는 자는 “목사님! 잘못했습니다. 저희 불찰로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목사님은 말씀을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전무(專務)해야 하는데 저희가 심려를 끼쳐 드려서 송구합니다” 하고 용서를 빕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어떤 부덕한 상황도 다 직분자들이 미리 돌아보지 못하고 섬기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며 목사 앞에 잘못을 빌어야 그 교회가 바로 된 교회입니다. 그 교회가 얼마나 생명으로 충만한 교회입니까? 이렇게 섬기는 자가 진정한 디아코너스, 직분자입니다.
그러니 직분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교회에서 “아무개 때문에 그렇다”고 트집 잡으려는 근성을 버리고 “내가 기도하지 못해서 그렇다” “내가 보살피지 못해서 그렇다” “목사님! 심려를 놓으십시오. 제가 잘못해서 그렇습니다” 하는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만약 교회에 이런 집사, 권사, 장로가 있다면, 그 교회는 부흥하게 돼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니까 인류가 살 듯이, 교회가 십자가를 져야 영혼이 살고, 이렇게 섬겨야 영혼이 삽니다.
<계속> *윤석전 목사 ‘직분자세미나’ 중 일부 발췌.
위 글은 교회신문 <29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