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분자의 자세와 역할(28)] 일사(一死) 각오로 말씀을 지키는 복음의 일꾼

등록날짜 [ 2012-07-10 10:05:19 ]

디아코노스(Diakonos)는 교회의 일꾼, 주님의 일꾼을 말합니다. 일꾼은 그야말로 일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교회 일꾼은 하인처럼 신분이 낮지만 영광스러운 직분입니다. 말로는 그 영광을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지금 비록 사람들이 볼 때는 교회 일을 하는 것 같지만,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요, 자기 영혼의 일을 하는 자입니다. 세상일을 하는 사람과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는 사람은 비교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일꾼임을 자부해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가리켜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했습니다(살전3:2). 그런 하나님의 복음의 일꾼으로 세워진 직분자가 하나님 일을 하지 않으면, 비참하고 참혹한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주인이 먼 길을 떠날 때 일꾼들에게 각자 역량껏 일하라고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자기에게 준 달란트를 묻어두기만 했는데도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일꾼들이 일하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에게 맡긴 일을 하지 않을뿐더러 남이 하는 일을 방해하거나, 잘 되어가는 일을 가로막는 이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남이 하는 일을 방해하고, “요즘 아무개 집사가 교회에서 왜 그렇게 설치는지 몰라?” 하며 충성하는 것을 배 아파서 시기 질투한다면, 과연 심판을 면할 수 있을까요?

주의 일에 시기 질투하는 것은 전부 마귀역사입니다. 마귀는 하나님 일을 하는 것을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교회에서 충성을 방해하는 자는 음부의 권세에 사로잡힌 자입니다. 음부의 권세인 마귀 앞잡이 된 자가 어찌 심판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자는 하나님 앞에 어엿이 설 줄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제강점기 때 어느 교단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했습니다. 총회를 열 때 200명 가까운 총대(總代) 옆에는 일본 형사가 한 사람씩 붙어 앉아 삼엄한 분위기를 조장했습니다. 총회를 열기 전에 이미 일경(日警)은 총대들에게 총회에 참석해서 신사참배는 죄가 아니라는 것에 동의할 것, 신사참배 문제가 상정되면 침묵할 것, 그렇지 않으면 총대를 사퇴하고 출석하지 말 것을 강요했습니다.

결국 그날, ‘신사는 종교가 아니므로 참배는 교리를 위배하지 않는다’는 논리로 신사참배를 결의한 것입니다. 어느 선교사가 “불법이오” 하며 이의를 제기했으나 묵살당한 채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칼날, 총부리 앞에서 목숨 하나 부지하려고 그런 것입니다. 우상숭배 하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총부리만도 못합니까? 우상숭배 하지 말라는 말이 칼날만도 못합니까? 총부리가 얼마나 두렵기에 크신 하나님의 말씀을 그토록 짓밟을까요?

내 목숨은 다쳐도 하나님 말씀은 절대 다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다치면 내 영혼이 다치고, 그 말씀이 온전해야 내 영혼이 온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기철 목사 같은 분은 차마 사람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순교하지 않았습니까?

“아무개야, 너 방망이로 때려죽일 텐데 그래도 우상숭배 안 하겠냐?” “나는 천 번 만 번 부서져도 괜찮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부서지면 큰일 난다. 그 말씀이 부서지면 나는 망한다. 네 몽둥이로 나를 치는 순간에 나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간다. 나는 이때를 기다렸다.”

위와 같은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몽둥이로 맞아 죽고, 칼로 목이 베이고, 총으로 난사당할지라도 지옥을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죽음의 고통이 너무 무섭고 떨릴지라도 예수를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지옥은 그런 죽음의 고통보다 억만 배 더 무섭기 때문입니다.

그때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무참히 고문당하는 주기철 목사를 보고 “야! 담대한 사람이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는 담대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지옥 갈 자신이 없으니까 그렇게 모진 고문을 당해도 신사참배를 거부한 것입니다. 지옥 갈 자신이 있는 사람은 지옥을 불사(不辭)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인데, 오히려 그들이 담대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방망이와 총칼은 얼마든지 받아들여도 지옥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방망이와 총칼은 끝이 있지만, 지옥은 끝나는 날이 없습니다.

만약 이마에 권총을 들이대고 “너 이래도 예수 믿어?” 하며 위협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지금은 끝까지 믿는다고 말하겠지만, 그때 가봐야 압니다. 베드로도 “예수님!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호언장담하더니 가야바의 안뜰에서 매 맞는 주님을 보고는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언젠가 죽고 없어질 목숨 하나 부지하려고 그렇게 야비해졌습니다.

일꾼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을 절대 거부할 수 없고, 믿고 맡겨 주신 그분을 절대 배신할 수 없어서 목숨 걸고 순종하는 자입니다. 그렇게 하는 자가 복음을 위한 일꾼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위한 일꾼이 교회에서 남이 하는 충성을 방해하고 시기 질투한다면 얼마나 불쌍합니까?

성경에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7:6)고 했습니다. 디아코노스, 일꾼이 무엇 하는 직분인 줄도 모르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임명받은 귀한 직분을 남용하고 있으니, 이것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는 말씀에 해당하는 자들 아닙니까? 우리는 성경에서 말한 합당한 복음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계속>

*윤석전 목사 ‘직분자세미나’ 중 일부 발췌.

위 글은 교회신문 <296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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