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의 ‘성막과 예수 그리스도’] 변하지 말아야 쓰임받는다

등록날짜 [ 2012-09-05 15:53:16 ]

하나님 나라는 변치 않는 사람이 가는 곳
마지막 때일수록 굳건하게 믿음을 지켜야

성막에서 가장 거룩한 장소인 지성소에 놓아둔 금 항아리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사십년간 먹은 만나를 넣어두고 대대로 보관하였습니다(출16:31~36). 그래서 언제든지 제사장이 지성소 법궤 앞에 가서 금 항아리를 열어보면 거기에는 만나만 들어 있었습니다. 금 항아리에는 만나 외에는 다른 어떤 불순물도 섞여 있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도 성령님을 모셔서 자기 심령을 지성소로 삼은 거룩한 그리스도인은 언제든지 심령을 열어보면 하늘 양식인 생명의 말씀, 은혜의 말씀만이 나와야 합니다. “예수 믿으세요” 하는 복음 전도의 말씀이 나와야 합니다.

거룩한 그리스도인은 언제 어떤 상황에 부딪혀도 항상 만나를 담아둔 금 항아리처럼 심령이 깨끗해야 하며, 도무지 더러운 것이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언제나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런데 거룩한 것만 들어 있을 줄 알고 심령의 뚜껑을 열어보니, 거기에는 악취가 나는 더러운 것, 눈 뜨고 볼 수 없는 못된 것만 잔뜩 나오면 그 사람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아무리 부딪혀도 변치 않는 믿음
어렸을 적에 집에서 소를 키웠습니다. 아침에 소죽을 쑤어 먹이려면 그 전날 학교에 다녀와서 동네 집집이 다니며 구정물을 가져다가 우리 집에 있는 커다란 구정물 통에 부어놓아야 합니다. 아무 구정물이나 다 가져오지 않고 소가 좋아할 맛있는 음식찌꺼기가 잔뜩 든 구정물만 가져옵니다.

다음 날 새벽, 소죽 솥에다 가져다 부으려고 구정물 통에 가보면 어제 잔뜩 가져다 놓은 구정물은 어디로 가고 맑은 물만 가득 있습니다. 작대기로 휘휘 저어보면 밤새 가라앉은 온갖 음식찌꺼기며 쌀뜨물이 다 올라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마음 좋고 법 없이 살 사람이라고 해도, 그 마음을 한번 휘저어 보면 금세 달라집니다. 가만히 있을 때는 누구나 맑습니다. 그런데 건드려 보면 속에서 온갖 것이 다 올라옵니다. 혈기, 짜증, 심통, 욕심....
“사람을 가만두지 않고 건드렸으니 그렇지!”라고 하겠지만,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건드려도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항상 ‘금’처럼 변치 말아야 합니다. 깨져도 ‘금’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저어도 우리 속에서는 맑은 물만 나와야 합니다. 지성소 법궤에 둔 만나 금 항아리처럼 안팎이 똑같아야 합니다.

내 안에 들어 있어야 할 거룩함
예수께서는 어떤 악한 자가 심령을 뒤흔들어 놓을지라도 절대로 요동하지 말고 거룩함을 유지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고자 하거든 겉옷까지 가지게 하며” “누구든지 억지로 오리(五里)를 가제 하거든 십리(十里)를 동행하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의 목숨도 주고, 거룩한 성령도 보내고, 영생도 주고, 천국도 주고, 축복도 주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를 담을 신령한 금 항아리로 새롭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나를 아무리 열어봐도 내 속에서는 거룩한 것만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아무리 건드려도 그 속에서 오직 선한 것만 나왔습니다. 로마 병정들이 예수를 끌고 가서 채찍으로 때리고, 홍포를 입히고, 가시관을 씌우고, 침을 뱉고, 저주하고, 갈대를 들리고, 뺨을 치고, 발길로 차고, 끌고 다니고, 결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죄로 십자가에 못 박아 최후에 죽일 때도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생각에서, 마음에서 한 마디라도 저주가 튀어나왔습니까?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유대인이 초대교회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일 때도 스데반 집사가 유대인을 저주했습니까?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60) 하고 기도하고 그 영혼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거룩한 성도의 심령 속에는 세상 더러운 것이 들어 있으면 안 됩니다. 거룩함이 들어 있어야 제값이 나갑니다.

변치 않는 신령한 것들
안과 밖이 변치 않는 금으로 되어 있다면, 그 사람은 어디를 가도 값어치가 나가는 사람입니다. 기독교는 수양(修養)으로 선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잠깐 참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소욕과 잘못된 근성을 인간의 수단으로 억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샘물은 물을 길을수록 계속 맑은 물만 나옵니다. 우리도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생명의 역사가 나오고, 건드릴수록 속에서는 거룩함이 터져 나와야 합니다.

예수를 채찍으로 때리니까 “너희가 나음을 입어라” 하시고, 예수를 저주하니까 “너희가 복을 받아라”고 하셨으며, 예수를 죽이니까 “너희는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라”고 하신 그 긍휼한 마음이 우리 속에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이 언제 변했습니까? 하나님은 변치 않는 아주 신령한 분이십니다.

교회가 주님의 몸이라면 몸 된 성전에 오는 사람들은 변치 않는 위대한 금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변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변치 말아야 합니다. 변하면 추합니다. 변한 것은 하나님께서 쓰지 않고 버리십니다. 삼손도 변하니까 버렸습니다. 사울 왕도 변하니까 버렸습니다. 초대교회 안수집사 니골라도 변하니까 버렸습니다. 우리는 안과 밖을 다 금으로 싸서 어디를 가도, 어디에 내놓아도 평생 변치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 때에는 특히 변하면 불행합니다. 실컷 믿어놓고 변하면 얼마나 아깝습니까? 변하는 것보다 불행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변치 않는 사람이 갑니다. 기왕에 신앙생활 할 바에 한번 하나님이 나를 귀하게 쓰시도록 나를 만들어야 합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04호> 기사입니다.

    아이디 로그인

    아이디 회원가입을 하시겠습니까?
    회원가입 바로가기

    아이디/비번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