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 지상강의 ‘산상수훈’] 죄로 죽게 된 자기 멸망을 보고 애통하라

등록날짜 [ 2013-05-28 14:29:39 ]

애통하는 자의 근본 문제를 해결해야 진정한 위로
내 죄 때문에 가슴 치며 회개할 줄 알아야 복이다

예수께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애통’은 팔자소관으로 억울하고 분해서 몸부림치는 그런 애통이 아닙니다. 자기의 가난한 심령을 보고 애통하는 것, 자기가 죄 때문에 멸망하게 된 것을 보고 애통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애통하는 자가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사람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죄 때문에 애통하는 자는 자신의 죄를 사해 주려고 대속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아들의 목숨으로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1:8)라는 말은, 죄 없다고 말하는 자는 절대로 위로를 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
죗값으로 사망을 피할 수 없는 사람에게 어떤 위로가 필요할까요? “아이고, 죽게 되셨다니 이 일을 어찌합니까? 그렇지만 기왕 죽는 마당에 마음 독하게 먹고 죽으세요”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런 말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죄 때문에 우는 자에게 “걱정하지 말아라.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네 죄를 짊어지고 내가 대신 죽었으니 사망에서 자유하라”고 위로하셨습니다.

죄 때문에 우는 자에게는 예수께서 죄의 대속물이 되셨기에 위로받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애통하되, 이 세상 물질이 없어 우는 자가 되지 말고, 죄 때문에 울어야 합니다. 도덕과 윤리 속에서 내가 잘못한 죄로 우는 것은 물론이고 죄로 영원히 죽게 된 모습을 보고 애통해야 합니다. 내 심령 속에 영원히 살 천국이 없어서 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전에는 “내가 무슨 죄인이야? 내가 언제 무슨 죄를 지었다고? 나만큼만 착하게 살아 봐라!” 하던 사람도 예수를 만나는 순간부터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닫고 통곡하는 것은 자신이 죄 때문에 멸망할 자라는 것을 말씀으로 확실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얻기 위해 애통하라
사도 바울은 율법으로는 흠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사람이었지만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를 만난 순간부터 자신이 절망적인 인간이며, 예수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하는 자는 예수가 필요하지 않다는 자요, 죄가 있다고 하는 자는 예수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자입니다.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라”하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롬7:25). 우리는 모두 죄를 깨달아 예수가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가 필요하여 예수를 얻으려고 애통해야 합니다. 그런 자가 복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죄 없다고 하는 자는 절대로 이 위로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죄 있다고 하는 자들에게 오셔서 그 죄를 멸해 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죽을 죄 때문에 우는 자만이 위로를 받아 행복해집니다.

시험을 받거나 고난당할 때 하나님의 위로가 언제나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 위로가 없는 자에게는 이미 영적인 복이 없습니다. 이 땅에서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고, 어떤 때는 핍박을 당하여 도저히 못 견딜 때에 “내 안에 하늘나라가 이루어졌다. 이제 조금 있으면 아버지 집에 간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가 영적으로 부유한 자요,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자입니다. 애통한 자를 위해 준비된 복이 바로 이 위로입니다.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라
성경에 나오는 나인성 과부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 과부는 이미 남편을 잃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뿐인 아들마저 죽었으니 인간으로서는 어찌해 볼 수 없을 정도로 애통이 극에 달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께서 “상여를 멈춰라” 말씀하신 후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일어나라!”고 명령하시자 과부의 죽은 아들이 벌떡 일어났습니다(막10:8~16).

주님이 주시는 위로는 등을 두드려가면서 “당신은 참 불행한 여자입니다. 이렇게 운다고 죽은 자식이 살아오겠습니까? 당신 몸만 힘드니 이제 앞으로 혼자 살아갈 궁리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러지 말고 정신 차리세요!”라는 위로가 아닙니다. 죽은 송장을 살려서 애통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위로입니다. 애통하는 자에게 이런 복을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이런 위로가 참으로 진정한 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29~30).

천국을 얻으려면 심령이 가난해야 하고, 하나님의 위로를 얻으려면 애통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려는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산상수훈은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해야 복을 받을 것인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복이 여기 있으니 와서 가져가라!” 말씀만 하셔도 어떻게든 복을 가져가려고 할 텐데 인간이 복을 받는 방법까지 직접 다 말씀해 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3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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