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3-09-11 09:19:52 ]
진정으로 깨끗하기 위해서는 죄를 해결해야만 해
하나님을 보는 것은 구원받은 자가 받을 복을 의미
예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 복이니, 그 복을 받고자 한다면 마음이 청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볼 수 없는 하나님
하나님은 누구도 볼 수 없는 분입니다. 성경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라고 했고(요1:18),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딤전6:16). 또 하나님을 본 후에 살아남을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33:20).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만나실 때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근처에 오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까닭은 그들이 죽을까 염려하셨기 때문입니다(출19:21). 이처럼 구약시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본다는 의미는 곧 죽는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자인 천사를 대면하는 일조차 하나님을 본 것으로 간주하고 두려워했습니다.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삿6:22).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예수께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당시 유대인에게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마어마한 복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근본적인 죄 해결이 청결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뵐 수 없게 된 까닭은 죄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죄로 에덴에서 쫓겨난 이후 인간은 그토록 사모하던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뵐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보는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곧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범한 죄 문제가 해결될 여지가 있다는 뜻입니다.
‘청결’, 즉 ‘카다로스’라는 말은 당시 유대교 정결 예식에서 주로 사용한 용어로서 도덕적, 종교 의식적인 정결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근본적인 내적 청결을 뜻합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말은 그냥 남에게 손해 끼칠 줄 모르고, 거짓말할 줄 모르는, 선천적으로 정직하고 순수한 성품을 지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성품을 지녔다면 하나님을 만나 봐야지 왜 못 봅니까? 아무리 그런 성품을 지녀도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여전히 죄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아무리 의롭다고 주장해도 하나님을 볼 수 없다면 나는 죄인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7:3)라는 말씀도 ‘네가 아무리 거룩하고 의로운 체해도 너는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청결하려 해도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가로막힌 죄가 허물어지지 않고는 청결할 수 없기에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하신 말씀은 속죄 받은 자가 받을 구원의 복을 말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는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곧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복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복을 얻으라고 강력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본 자가 하나님을 본 자다
하나님을 ‘본다’라는 말은 경험을 통해서 실제로 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보여 달라는 니고데모에게는 예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3:3). ‘거듭난다’는 말은 ‘나는 죽고 다시 태어난다’는 뜻으로 위로부터, 즉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입니다(요3:5~8). 거듭남은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실제 경험을 말합니다.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는 일은 경험으로 얻는 사실입니다. 육신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부모로 여기는 것도 실제로 어머니 태(胎)에서 나온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응애!” 하고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내놓으라고 계속 요구합니다. 나도 이제 가족의 일원이 되었으니 무엇이든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일도 물과 성령으로 실제 경험한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 역시, 자녀가 자기 부모에게 당당히 요구하듯, 응답받을 권리가 있으니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적과 표적을 본 빌립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14:8). 그때 예수께서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본 자”라고 말씀했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 이 말씀은 예수께서 흘리신 피로 죄를 씻어 청결해진 자가 하나님을 본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최고의 안경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로 죄 사함받아 거듭나야 청결해지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됩니다. 오직 예수만이 하늘나라로 가는 유일한 길이요, 예수만이 하나님을 뵙는 안경이요, 또한 자신을 보는 안경입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5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