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4-01-07 09:50:02 ]
세상에서는 법대로 처벌하려고 죄를 내놓으라 하지만
하나님은 처벌에서 해방시키려고 죄를 내놓으라는 것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처음 하신 말씀이 “회개하라”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아무리 회개하라고 해도 회개치 않으니까 “마음속으로 남을 미워한 죄도 칼로 사람을 죽인 죄와 똑같다. 너희 마음속으로 음욕을 품은 자도 간음한 자다. 마음속으로 남의 것을 탐낸 욕심도 도둑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17~32).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의로운 자를 억지로 다 죄인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있어서 자기 영혼이 죽어 가는데도 그 죄를 내놓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든 죄를 찾아 주고 살게 하려는 하나님의 심정이요, 의도요, 섭리입니다. 죄의 씨가 그 안에 있으면 결국 죽기 때문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4~15).
죄인을 찾아내는 침례
죄는 인간을 죽이고 영혼을 영원히 지옥으로 보냅니다. 죄는 인간을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고, 파멸과 저주로 이끌고 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괴로워하고, 죄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칩니다.
성경은 죄의 결과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죄가 나를 끝까지 죽이지 못하도록 죄와 투쟁해서 이겨야 하고 내가 부지중에 범한 죄라도 끄집어내서 회개해야 합니다. 사람 앞에는 죄를 많이 찾으면 찾을수록 죄인이 되기 때문에 불리합니다. 이 세상 법정에서는 죄를 내놓을수록 형량이 무거워집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는 죄를 내놓을수록 해결받아 형량이 가벼워지고 의로워집니다.
이것이 세상 법과 하나님의 법이 다른 점입니다. 세상에서는 법대로 처벌하려고 죄를 내놓으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처벌에서 해방시키려고 죄를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최대 희소식은 회개입니다. 회개하라는 말은 죄를 끄집어내라는 것입니다. 죄를 내 안에 두지 않으려는 의지의 발로요, 죄를 대적하고 파괴하는 능력이 회개입니다. 죄와 결별을 선언하는 행위가 회개인 것입니다.
그런데 죄의 심각성을 몰라서 못 끄집어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도 자신들이 율법을 잘 지키고 있고 겉으로 드러나는 죄가 없으니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기록된 음부에 떨어진 부자도 마찬가지로 자신은 회개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음부에서 그 부자가 아브라함을 아버지라 불렀던 것으로 볼 때, 그는 아브라함의 후손, 즉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선민(選民)으로 생각하며 살았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이미 구원을 받았으리라 확신하고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예수를 믿고 죄를 회개하여야 받습니다. 내 죄를 대신하여 죽어 줄 예수가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조상이라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이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만약에 회개치 않는다면 찍어 불에 던져 버려진다”고 한 것도, 자기 혼자 아무리 의인이어도 하나님이 보실 때 죄인이면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는 것은 사망의 근원인 죄를 분리시켜 내지 않으면 죽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유대인에게 베푼 침례는 죄인을 찾아내고, 죄를 자각하게 하며, 죄로부터 오는 멸망에서 살 자를 찾아내는 침례입니다.
어린양 예수를 발견하는 침례
요한이 요단 강에서 유대인에게 침례를 베푼 또 다른 목적은 예수를 이스라엘에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침례 요한이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고 한 것은 예수께서 죄를 짊어지고 갈 길을 열라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짐승을 잡는 일이 사라지게 되었으니 이제는 그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실 어린양 같은 하나님의 아들을 소개받으라는 말입니다.
예수는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어린양입니다. 구약시대에 속죄의 제사를 위해 양을 준비하듯이 우리가 회개할 때 예수가 준비되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자에게 예수의 피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병든 자에게는 예수가 채찍에 맞으시고 병을 고치신 치유가 준비되어 있으며, 저주받은 자에게는 주님이 저주를 받으심으로 속량하신 은혜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죄가 전혀 없습니다. 죄가 없기 때문에 그분만이 나를 위해 죽으셔서 죄에서 구원해 주실 구세주가 되십니다. 요한이 “회개하라”고 하는 것은 죄를 가지고 나온다면 그 죄를 해결할 예수가 요단 강으로 온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유대인을 향해 회개하라고 한 것은 예수를 만나라는 것입니다. 죄를 가지고 나온다면 그 죄를 해결할 예수를 요단 강으로 불러들이겠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없다면 “나는 죽을 죄인입니다” 하고 자기 죽음의 죄를 내놓는 것도 하나의 의식에 불과합니다. 주님이 물속에 들어가시면서 “네 죄로 내가 이렇게 죽는다”라는 것을 보여 주시고, 물에서 나오심으로 “너희는 나와 연합하여 다시 부활한다”는 것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유대인의 침례도 의미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요단 강에서 침례를 받을 때, 그들을 죄로 인한 죽음에서 부활시킬 예수가 준비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잘 지켰던 바울이 “나는 율법으로 흠이 없는 자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율법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난 후에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했으며 “나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같이 지극히 작은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율법의 사명을 모르고 자기 죄를 모를 때는 그렇게 의가 당당해서 예수 믿는 도를 가진 자들을 모조리 죽이려고 나서더니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 그것이 죄인 줄 발견한 다음에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결국 바울도 예수를 만나서 산 자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이 죄인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예수를 만날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요한이 회개하고 침례를 받으라는 것은 예수를 만날 자격을 갖추라는 소리입니다. 나를 위해 죽어 줄 어린양이 왔는데 죄를 들고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회개하여 예수 만날 자격을 갖추라는 것입니다. 어린양이 피 흘릴 조건을 부여하여 예수의 첩경을 예비하라는 말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말도 죄를 들고 나와 회개하고 신앙생활 하라는 것입니다(행2:38;22:16). 그래야 어린양이신 예수를 요단 강에 불러들여 예수와 만날 것이요, 예수께서 내 죄를 담당하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죄인과 하나님의 아들이 만나는 첫 대면이 바로 요한의 침례입니다.
이처럼 침례 요한의 사명은 유대인들에게 침례를 주어 회개케 하고 침례 받는 자 중에서 메시아인 예수를 소개하는 것까지였습니다. 요한이 예수께 침례를 준 이후, 요한은 헤롯 왕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일을 책망한 일 때문에 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처형당함으로써 이스라엘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사명을 마쳤습니다(마14:1~11,막6:17~29). 이로써 이스라엘의 선지자 시대가 막을 내렸습니다.
이제 요한이 소개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인류를 위한 대속물로 우리에게 직접 오시는 일만 남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침례 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고 했습니다(마11:11).
유대인들은 그런 위대한 선지자 요한으로부터 침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죄를 회개하고 예수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받아 천국을 소유한 자들이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침례 요한보다 더 큰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계속>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윤석전 지음)
위 글은 교회신문 <368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