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가 전하는 디모데후서 3장 강해(12)] 헛된 자긍을 버리고 하나님 말씀이 지배하게 하라

등록날짜 [ 2014-03-04 14:29:06 ]

내 생각을 버리고, 오직 주님께서 주신 생각으로 살며
기도와 전도, 충성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사람 되어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5~8).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이같이 고백했습니다. 자신이 관제(灌祭)와 같이 육체를 아끼지 않고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을 지킨 이유는 바로 주님이 나타나실 그 날을 사모하여 달려온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는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덧붙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 시대는 갔다. 이제 나는 늙어서 인생을 마감하고 떠날 기약이 가까웠다. 그렇다면 다음 세대에는 어떤 이가 이 면류관을 얻으려고 달음질하겠느냐?”라는 의도로,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자라면 사도 바울 자신처럼 목숨 바쳐 주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자는 바울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울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수준을 넘어, 바울처럼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처럼 전심전력을 다해 기도할 수밖에 없는 사람, 충성할 수밖에 없는 사람, 감사할 수밖에 없는 사람, 전도할 수밖에 없는 사람, 주를 위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근성으로 충만한 자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기도할 수밖에 없고, 충성할 수밖에 없고, 감사할 수밖에 없고, 전도할 수밖에 없고, 주를 위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평생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목사가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목사는 이 세상에 산재한 불가능을 예수의 능력으로 가능케 해주어야 합니다. 이런 일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이름의 능력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께 기도하여 주님의 능력을 힘입을 수밖에 없는 목회자가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또 구령의 열정을 주셔서 자나 깨나,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사나 죽으나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는 자가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또 목회 사명을 받아 죽도록 충성할 수밖에 없게 된 점도 감사합니다. 그와 함께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하나님께 영육 간에 받은 은혜가 많아 죽을 때까지 감사하지 않고는 안 될 사람이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자기 인정, 자기 견해를 버리라
그런데 자긍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밖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긍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예수로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긍하는 사람은 ‘꼭 그렇게 안 해도 살 수 있어’라는 자기 견해가 뚜렷합니다.

사람들은 거의 다 신앙생활 할 때 자기 견해가 있습니다. ‘자긍하며’라는 말은 헬라어로 ‘알라조네스’라고 합니다. 이 말은 본래, 시골 장마당을 돌아다니며 효과 없는 약을 선전하며 뽐내는 돌팔이 약장수를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돌팔이 약장수처럼 자긍에서 나오는 내 견해를 뽐내지 말고, 영원히 옳고 변함이 없으신 주님의 견해로 자신을 다스려야 합니다. 내 견해는 무너지고 하나님이 주신 견해로만 온전히 움직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는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긍이 무너져야 주님이 일하신다
“베드로야, 네가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실 때 베드로는 분명히 서운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죽을지언정 제가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 한마디로 자긍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시인하고 인정해야 할 결정적인 자리에서는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막14:71). 그때 닭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베드로는 그 자리에서 통곡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절대로 사랑하는 주님을 배신하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닭 울음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나약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실체를 알았습니다. 그때 자긍심이 무너졌습니다. 우리도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자긍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긍하는 것보다 두렵고 무서운 일은 없습니다. 자긍하는 그 시간에 주님이 다시 오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기 안에 가득 쌓인 ‘자긍’을 쏟아내야 합니다. 그 대신 믿음의 등불을 들고 주님을 간절히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 오시면 들림받는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기도하지 않고는 못 사는 사람, 하나님 말씀 안 듣고는 못 사는 사람, 감사하지 않고는 못 사는 사람, 충성하지 않고는 못 사는 사람, 전도하지 않고는 못 사는 사람, 주를 죽기까지 사랑하지 않고는 못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안에서 자신을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75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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