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4-07-08 09:42:30 ]
사랑할 마음이 없는 곳에 미움과 시기가 나는 것
한 번 쌓인 증오심이 평생을 걸쳐 아픔으로 남아
지난 호에 우리는 말세에 고통하는 때에 다다르면 사람들이 얼마나 무정해지는지 알아보았습니다. 이번 호부터는 말세에 사람들이 얼마나 원통함을 풀지 않고 살아가는지 알아봅시다.
사랑이 없을 때 원통함이 생긴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15:12). 하나님의 계명은 첫째도 사랑이요, 둘째도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사랑하라고 말씀하셔도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속에는 사랑할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내일 십자가라는 중대사를 앞두고 땀방울이 핏방울같이 되기까지 애절히 기도하실 때, 제자들에게 잠시 동안만 나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으나 제자들이 거듭 졸자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시고 체념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사랑하는 선생님을 위해 기도할 힘이 없었습니다. 이렇듯 우리도 사랑할 힘이 없어서 못 합니다. 사랑할 힘이 없으니 점점 더 사랑받으려고만 합니다. 만약 목사가 성도에게 사랑받으려고 한다면, 아마 속상하고 분하고 원통한 일이 생기면 당장 목회를 팽개칠 것입니다. 그러나 목회자가 성도에게 사랑을 주려고만 하면, 속 썩이고 분노케 하는 성도라도 안타깝고 딱하게 보입니다. 성도들을 위해 더욱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을 주려는 사람에게는 적(敵)이 없지만,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는 사람에게는 적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사랑한 그 이상으로 되받으려 하기에, 기대한 만큼 대가가 없으면 상대를 원망합니다. 그러나 주기만 하는 사람은 대가와 아무 상관없이 항상 주고 싶어 합니다. 요즘은 교회 안에서조차 사랑받으려 하지 사랑을 주는 이가 적어 안타깝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그 자리에 미움, 시기, 질투와 같은 악한 마음이 자리합니다. 이것들이 뭉쳐서 폭발하는 것이 ‘원통’입니다. 부부간에도 십 년쯤 살다 보면 ‘원통하다’는 표현을 씁니다. “당신을 믿고 십 년간 온갖 고생 다 하며 살아 왔습니다. 자식 낳아 기르고, 살림하고, 시부모 봉양하고, 시형제 뒷바라지까지 했는데 이제 와서 당신이 내게 이럴 수 있습니까?” 원통함이 터져 나옵니다. 원통하다는 말은 ‘내가 네게 이만큼 했는데 왜 너는 나를 알아주지 않느냐?’라는 말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하나님도 무척 원통할 거리가 많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천지 만물과 독생자 예수를 주시고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주셨습니다. 말씀과 능력도 주시고, 기도 응답이라는 복도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살면서도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나님이 있으면 도대체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깁니까? 하나님이 있으면 나와 보세요” 하며 불평불만 하니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원통할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런 원통함이 조금도 없습니다. 인간이 대들수록 우리를 더욱 사랑하십니다.
원통함은 물려주지 말아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자기 부모 중 어느 한쪽을 몹시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모 중 한쪽이 상대를 지속적으로 미워하는 감정을 자식에게 쏟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너희 아버지는 결혼해서 지금까지 나를 이렇게 고생시키고도 무정하게 박대했다.” 어머니는 원통함을 호소하려고 한 일이지만, 자식은 아버지를 증오하고 미워하게 됩니다. 겉으로는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속으로는 항상 자기 어머니처럼 아버지에게 증오감과 적대감을 품고 자랍니다. 이는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또 어느 가정에는 아버지가 자식 앞에서 어머니를 안 좋게 말해서 자식들이 자기 어머니를 무시하거나 증오심이 쌓이게 합니다. 결국 자식들이 속으로 ‘아,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구나’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이렇게 부모의 잘못으로 자식이 부모 중 한 쪽을 오해해서 그 가정에 평화가 깃들지 못하게 합니다.
자식이 결혼해서 분가한 후에도 부모를 돌봐주며 효도해야 하는데, 자기 어머니나 아버지가 심어 놓은 증오심 탓에 부모를 봉양할 마음이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자식에게 효도 한번 못 받고 죽는 아버지나 어머니가 있습니다. 훗날 그 자식이 결혼해서 자식 낳아 키워보면, 어머니나 아버지가 상대를 잘못 본 것이 자신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 것을 알게 되지만 돌이키기에는 세월이 너무 많이 흘렀습니다. 각별한 정이 없으니 불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다 자식과 부모를 원수 짓게 하려고 작정한 마귀역사입니다.
원통함은 풀어야 한다
제 어릴 때 기억을 더듬어 보면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와 저희 형제들을 몹시 핍박하셨습니다. 그래도 어머니께서는 아버지를 원망하는 말씀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핍박하는 아버지를 미워하고 불평하면 오히려 “아버지가 수고하셔서 너희들 지금 먹고살잖아. 우리 동네에 굶는 애들이 얼마나 많니? 그런데 아버지가 너희들 굶기더냐? 감사한 줄 알아야지. 너희 아버지가 몰라서 그러신다. 아버지도 예수 믿어 구원받도록 기도해라.” 어떻게든 자식의 마음속에서 아버지를 미워하는 마음을 없애 주시려고 몸부림을 치셨습니다. 이것이 올바른 가정교육입니다.
원통함이 있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사랑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원통함을 풀지 못합니다. 세상 영화나 드라마, 무협소설 같은 것을 보면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절대 용서치 않겠다”라며 원수가 대를 이어 피를 부르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런 이야기에 사람들은 열광합니다. 원통함은 결국 살인까지도 불러오기에 비극 중의 비극입니다.
원통함은 당대에 빨리 풀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조금이라도 맺힌 것이 있으면 내가 먼저 가서 풀어야 합니다. 안 풀면 이것이 결국은 죄의 씨앗이 됩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억울한 일을 당했다 하더라도 내가 풀어야 합니다. 그 원통함을 후손에게 물려주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화해와 사랑만 물려줘야 합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9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