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4-07-15 11:09:31 ]
성도 사이는 천국에서 영원히 살 형제자매지간
마음속에서 속상함이 쌓이면 결국 갈라지는 것
옛날에는 길바닥에서 동네 아이들끼리 치고받으며 싸울 때가 많았습니다. 사정없이 싸우다 보면 피가 터지고 이빨이 부러지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싸움을 말리려고 부모들이 나타나면 절대로 남의 자식부터 야단치지 않습니다.
잘했든 잘못했든 일단 자기 자식을 붙들어 놓고 야단치다 매로 때리기도 했습니다. 다른 집 아이의 부모도 쫓아와서 마찬가지로 자기 자식만 야단칩니다. 그러고 나면 동네 어른이 부모들과 함께 아이들을 오라고 해서 화해를 시킵니다. 그 자리에서도 서로 자기 자식이 잘못해서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졌다며 사과합니다. 이렇게 하니 동네에서 아이들 때문에 어른들이 사이가 벌어지거나 원한이 생기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부모들이 자식을 이렇게 기르다 보니 동네에서 이웃끼리 아이 때문에 원통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부모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전과는 반대로 “어떤 놈이 우리 애를 때렸어!” 하면서 무조건 자기 자식부터 감싸기에 급급합니다. 그러다 보니 사소한 일로 원통해 하며 이웃과 다퉈 원수처럼 지내기 일쑤입니다. “말세에는...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라고 한 말씀 그대로입니다.
원통함 없이 서로 사랑하라
한 교회의 지체인 우리는 혈육보다 더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한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하늘나라에서 같이 살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볼 때는 부모, 형제, 자매가 한 집에 살면서 가깝게 지내지만 만약 그 집안에 예수 안 믿고 지옥 갈 사람이 있다면 가족이라 해도 먼 사이입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지금 한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끼리가 더 가깝습니다.
우리는 악착같이 내 가족을 예수 믿게 해서 예수 안에서 한 형제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조금만 성도끼리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금세 토라져서 다시는 서로 안 볼 것처럼 대하고, 심지어 그 사람 보기 싫어서 교회를 떠나야겠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존심과 분함을 못 이기니까 그 성도의 꼴이 보기 싫은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서 과연 할 행동입니까? 성도들끼리는 서로 원통한 일, 분한 일이 없어야 합니다. 오직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7~8).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할 형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도 ‘형제들아’,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도 ‘형제들아’, 어디에서든지 성도들을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그만큼 예수의 피로 거듭난 자녀로서 한 형제, 즉 피의 형제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천국에 가서 예수 믿는 우리는 세상의 혈통으로 난 자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서로 뜨거운 사랑 속에서 영원히 살 형제들입니다. 그런데도 서로 원통함이 있고, 미움과 다툼이 있다면 아직도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서 함께 살 한 형제라는 인식을 못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미운 사람이 있거나, 원망하는 사람이 있거나, 원통한 사람이 있다면 예수 안에서 함께하는 형제는 아닙니다. 가정에서도 부모에게 가장 걱정 끼치는 일이 형제끼리 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가장 마음 아파하실 때가 형제끼리 서로 사랑하지 않을 때일 것입니다. 그래서 피차 뜨겁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벧전1:22).
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엡4:26). 우리 속에 조금이라도 원통함이나 분함이나 속상함이 남아 있거든 서로 다 푸시기 바랍니다. 말세에는 이렇게 원통함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성경에 말하고 있습니다.
원통함을 풀어 버리라
교회 안에서 성도들끼리 우리는 한 형제라는 인식을 확실히 한다면 상처를 주지도 않을 것이요, 상처 입을 이유도 없습니다. 성경은 가인같이 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가 악한 자에 속해 아우를 죽였다고 했습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요일 3:10~12).
우리는 원통할 것도 없고 미워할 것도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천국 시민으로서 영원히 살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서로 긍휼히 여길지언정 원통할 이유는 없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신령한 영적 가치를 아는 수준 있는 사람입니다.
목사의 눈에는 신기하게도 세상 사람이 아무리 옷을 잘 입고 화장을 예쁘게 해도 별 매력이 안 느껴집니다. 그런데 우리 교인들에게는 그저 정이 갑니다. 왜 그럴까요. 한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형제끼리 원통해 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면 자기만 손해입니다. 자기 가치만 떨어집니다.
말세에는 원통함을 풀지 아니한다고 했으나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말세에 낙오자가 되지 않도록 원통함이 있거든 풀어야 합니다.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라는 말이 우리와는 상관없는 말이 되도록 꼭 사랑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평생 원망, 원통함 없이 날마다 주 안에서 사랑으로 살 수 있도록 하나님과 관계나 사람과 관계에서 원통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9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