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난이 잘못인 줄 알아도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면
기어이 정죄하고 마니 주님 안에서 반드시 이겨야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딤후3:3).
성경을 보면 사나운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친동생 아벨을 죽인 최초의 살인자 가인도 무섭게 사나운 자였습니다. 아담이 죄를 지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아내와 동침하여 가인과 아벨이라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이 자기 부모가 지은 죄를 회개하여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해 보려고 하나님께 제사했습니다.
아벨이 양을 잡아 피 흘려 그것을 제물 삼아 제사하자 하나님께서 그 제물과 제사는 열납하셨으나, 가인이 땅의 소산으로 드린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예표하는 짐승의 피 흘린 제사만 하나님께 상달된 것입니다. 그러자 가인은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창4:5). 하나님께서는 그런 가인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창4:6~7).
가인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아우 아벨을 들에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려던 제사에 실패하자 분노가 치솟아 인간 최초의 살인행각이 친형제 사이에 벌어진 것입니다.
한 부모에게서 태어나 오순도순 살아 온 친형제가 어떻게 하루아침에 분노를 참지 못해 형이 동생의 목숨을 앗아 그 시체를 흙에 파묻을 정도로 악랄하고 사납게 변질할 수 있습니까? 정말로 인간의 정서로는 상상이 안 되는 이 일이 바로 악한 영의 역사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요일3:8, 12).
안색을 변하게 하는 분노
마귀에게 속하여 죄를 짓는 자를 보면, 먼저 사납게 분을 내서 얼굴색부터 변합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얼굴색이 변할 정도로 분을 밖으로 내뿜으면 안 됩니다. 얼굴색이 변할 정도로 분노하면 욱하는 마음에 자신을 제어할 수 없는 악한 일을 저지르고 맙니다.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를 상달한 동생에게 시기·질투가 발동해 죽이고 싶은 생각이 불 일 듯 일어날 때 ‘내가 동생을 죽이면 안 되는데…’라는 양심의 가책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분명히 심장이 요동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번 분노를 발해 그 사나움을 걷잡을 수 없게 되었기에 결국 그런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것입니다.
우리도 안색이 변할 만큼 분노가 치밀어 사나워지려고 하면, 그것이 최초에 죄를 짓게 하는 자 마귀가 부추기는 악한 역사인 줄 알고 내 속에서 끓어오르는 사나움을, 그 무서운 죄의 소원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의 힘으로는 한번 폭발한 사나움을 다스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주셔서 성령의 소욕으로 육신의 소욕과 정욕과 못된 성질을 근본적으로 내게서 다스려 주십니다. 성령 충만한 자는 성령께서 그런 육신에서 올라오는 모든 악한 소욕을 다스려 줍니다.
성령 충만만이 육신의 소욕을 이용한 마귀의 근성과 죄를 다스릴 유일한 능력입니다. 성령 충만으로 내 속에서 올라오는 사나움을 다스리지 못하면 결국에는 그 사나움이 나를 죄의 도구로 사로잡아 가고 맙니다.
언제든지 내 속에서 안색이 변할 만큼 악한 소가지가 나오고, 안색이 변할 만큼 육신의 소욕이 드러나고, 안색이 변할 만큼 부끄러움이나 자존심이 치밀어 올라오거든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라고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경고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이겨야 합니다.
또 “내가 이처럼 사나우니, 말세에 들림받을 신분의 자격에서 탈락할 가능성이 크구나. 어찌하면 좋은가. 주님 오시기 전에 절대로 사나움에 져서 신부의 자격이 박탈되면 안 된다, 믿음에서 좌절하면 안 된다”라고 하며 이겨 내야 합니다.
육체의 정욕에서 나오는 사나움을 이길 힘이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어떤 것도 순간에 올라오는 분노를, 변하는 안색을 절제하지 못합니다. 나의 이런 사나움을 누구도 절제시키지 못합니다.
사나운 사람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자기 성질을 폭발해서라도 어떻게든 육신의 욕구 충족을 해소하려고 혈안입니다. 그리고는 제정신이 돌아오면 자신이 저지른 악한 짓을 땅을 치며 후회합니다.
악한 자에게 쓰임받아 못된 죄를 지을 대로 다 지어 놓고 말입니다. 후회해도 때는 늦었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마귀역사입니다. 이 사나움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역사하심밖에는 없습니다.
겸손과 온유함으로 승리하라
말세에 ‘주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고백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사나움을, 죄를 다스릴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5).
사나운 자는 들어오는 복도 퍼내 버립니다. 하나님께 복 받을 그릇이 뒤집혀서 아무것도 담을 수 없습니다. 이런 자는 하나님이 축복 주실 그릇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볼 때는 바보 같고 무시당하는 것 같지만 언제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제한 없이 담을 만한 그릇을 가지고 있는 자가 복된 사람입니다.
사나운 사람과는 주의 일을 하려 해도 언제 변할지 모르니 미래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조금만 기분 나쁘면 홱 돌아서서 못한다고 하니 하나님께서 어찌 그와 손잡고 일하겠습니까.
끝까지 온유하고, 끝까지 겸손하고, 끝까지 주님의 사정을 알아서 주님의 심정 가운데로 깊이 들어가 주님 뜻을 기어이 달성하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쓰십니다.
내 속에 육신의 소욕에서 나오는 사나움이 터져 나오려고 할 때마다 성령의 도우심과 온유, 겸손으로 이겨서 마지막 때에 승리하여 최후에 주님 만나는, 들림받는 신부가 되기를 바랍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99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