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가 전하는 디모데후서 3장 강해(41)] 하나님을 배반하지 말고 그 은혜에 감사하자

등록날짜 [ 2014-10-06 23:23:34 ]

예수 이름을 팔고 그것으로 내 배만 채우는 것도 배신
스스로 경계하고 각성하여 오직 주님만 드러나게 해야


우리가 교회에 열심히 다닌다고 해서 말세에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점을 확실히 밝히셨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이 말은 바꿔 말하면 “배반자여, 내게서 떠나가라”는 뜻입니다.

“내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말하지 않더냐? 그런데 어찌하여 너희가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너를 드러내는 상업 행위에 사용했느냐?”는 추궁입니다.

“왜 내 이름을 파느냐? 왜 내 능력을 돈과 바꾸느냐? 왜 내 능력을 네 명예를 내세우는 데 쓰느냐? 왜 내 이름을 네 의를 드러내는 일에, 네가 대접받는 일에 쓰느냐?”는 강한 책망입니다.

그런 자는 한마디로 신앙의 배도자, 배반자라는 말입니다. 

사랑을 잊은 배반자 
주님께서 가야바의 뜰에서 모진 매를 맞을 때 수제자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저주와 맹세까지 하면서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맹세하던 제자가 삽시간에 이렇게 배반자가 된 것입니다.

성도들도 은혜 받을 때는 “우리 목사님이 제일이야!” 하며 자기 목사를 추켜세우다가도 시험 들면 한순간에 목사를 배반하며 욕하고 헐뜯습니다. 성도를 천국까지 데리고 가는 데에 자기 인생을 바치기로 작정한 사람이 목사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목사에게 배은망덕하여 사랑과 관심을 원수로 갚습니까? 이는 시험 들었다는 증거요, 사단의 역사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사랑을 배반하고 유업을 받아 먼 타국으로 떠난 이유도 아버지의 자애로운 사랑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목사는 어쩌면 그렇게 자기를 배반한 성도일수록 더 잊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지옥 갈 우리 영혼을 포기할 수 없어 독생자를 보내 대신 십자가에 죽여서라도 죗값을 갚고 인류를 구원하셨듯이, 목사도 자기를 배반하고 돌아선 성도를 잊을 수 없어 그 영혼이 망할까 봐 눈물로 기도합니다.

이런 목사의 애절한 심정을 누가 알겠습니까? 구역 식구가 아무리 미운 짓을 해도 구역장은 그 구역 식구를 미워할 수 없습니다.

철없는 교구 식구가 신앙생활 잘하라고 권면하는 교구장을 미워하여 험담해도 교구장은 그를 절대로 미워할 수 없습니다. 영혼 섬기는 직분을 맡는 순간부터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마음이 직분자의 가슴 속에 흘러 넘치기 때문입니다.

사랑한 만큼 배반의 상처도 크다
오해는 배반을 낳고 배반은 재앙을 불러일으킵니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 사랑의 영역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이 신앙의 배반입니다. 말세에는 이렇게 신앙의 배반 행위가 넘쳐난다고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배반자에 대한 심판은 무섭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배반자는,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닙니다. ‘알곡과 가라지’ 비유에서 말하는 ‘가라지’는 믿는 자 중에서 배반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 있으면서 가라지 노릇, 쭉정이 노릇하는 배반자가 되지 말고 알곡이 되어야 합니다.

배반당하면 누구라도 아픕니다. 길 가다가 모르는 사람에게 욕 먹었다고 해서 크게 마음 아파할 사람은 없습니다. 욕하는 사람에게 투자한 것이 없으므로 그저 잠시 기분 나쁘다 맙니다.

하지만 목사가 자기 성도에게 욕을 먹었다면 가슴이 몹시 아플 것입니다. 그 성도에게 쏟아부은 사랑이 많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양이고 자기 생애를 쏟아서 주님의 명령대로 사랑한 성도에게 욕을 먹었으므로 가슴이 아픕니다.

주님은 인류의 죄를 사해주시려고 자기 목숨을 투자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자기 아들을 투자했습니다.

투자한 분량이 많은 만큼 배반당할 때 받는 아픔도 큽니다. 투자한 만큼 고통스럽고 괴롭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절대 배반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내어주어 죽이기까지 투자하셨으므로 우리에게 배반당하시면 더욱 괴로우실 것입니다. 말세가 닥치면 고통 하는 때가 이른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배반할 때 배반당하는 하나님도 고통스럽고, 배반하는 인간도 영혼의 때에 당할 심판이 고통스럽습니다.


감사하는 자가 되자
우리는 하나님을 고통스럽게 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감사는 은혜 받은 자의 표현입니다. 감사하는 자는 절대로 배반하지 않습니다.

우리 속에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만 꽉 차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무너지면 순간에 배반자가 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믿노라 하면서 믿음의 사람을 죽이고 잡아 주는 것이 배반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였으나 하나님의 뜻을 몰랐기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배반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무지가 배반자로 만듭니다. 일평생 살면서 하나님 말씀에 절대 순종하고 배반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자를 주님께서도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육신의 소욕으로 주님을 배도하여 신앙생활하기가 어렵다고 하지 말고 성령의 소욕으로 육신의 소욕을 유산하고 주님을 사랑하여 최후의 날 하나님의 영광이 자신의 것이 되기 바랍니다.

평생 배반자가 되지 말고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즉각 주님의 도움을 받으며 살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40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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