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어 없어질 가치 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목숨을 걸어도 아깝지 않는 신령한 일에 투자해야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에서 디모데에게 말하기를 “말세에는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다”며 육신의 정욕을 좇는 쾌락을 엄중히 경계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쾌락
세상에는 육신의 낙(樂)이 수없이 많습니다. 좋은 옷을 입는 낙,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는 낙, 멋지게 화장하고 머리 꾸미는 낙, 원 없이 사고 싶은 것 사는 낙 등등.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만드신 후에 우리 인간에게 만물을 소유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고 하셨기에(창1:27-31) 인류에게는 세상 수많은 낙을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제쳐 놓고 하나님 말씀을 떠나 육신의 생각대로 정욕의 충족만을 위해서 즐긴다면 그것을 ‘쾌락(快樂)’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쾌락을 좇는 것을 ‘탐심’ 곧 ‘우상숭배’라고 정의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했습니다(골3:5~6).
세상 것들은 우리가 사랑하고 섬기고 경배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필요에 따라 쓰는 소모품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어떤 낙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내게 주어진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에서 육신의 정욕을 좇아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참으로 추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는 때가 곧 말세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인 낙이 얼마나 위대한지 아는 사람은 세상 낙이 얼마나 추하고 더럽게 보이는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분수에 맞지 않게 수억 원짜리 명품 옷으로 사치를 부렸다고 합시다. 육의 사람이 볼 때는 아주 예쁘게 보여서 부럽기도 하겠지만, 영의 사람이 볼 때는 여느 옷처럼 그저 신체를 가리고 보호하는 데 필요한 도구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비싼 옷을 입었다고 사람들에게 뽐내고 자랑하는 모습을 보면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값비싼 자동차를 타고 남들에게 과시하는 것을 큰 낙으로 압니다. 차는 그저 편리한 운송수단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영원한 가치가 없는 것들을 가지고 뽐내며 즐기려는 것이 ‘쾌락(快樂)’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누릴 낙은 이런 육신의 ‘쾌락’이 아닙니다. 육신의 낙은 70~80년 살다 그 육신이 사라지면 없어질 유한한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변치 아니하시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낙을 누려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낙원(樂園)은 바로 영적인 낙이 영원히 충만한 곳입니다.
목숨과도 기꺼이 바꾸는 즐거움
영적인 쾌락이 영원토록 계속되는 낙원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들이 아닌, 영원한 가치를 지닌 것을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가장 귀한 것이 영혼입니다. 성경은 천하보다 한 영혼이 귀하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영혼 구원이 가장 귀한 일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막8:35~37).
천하를 위해서는 목숨을 내어 주지 않을지라도 영혼을 살리는 일을 위해서는 목숨을 아낌없이 내어 놓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목숨을 주고서라도 기쁘게 받을 수 있는 신령하고 영원한 보상이 하늘의 면류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면류관을 받기 위해 영혼을 구원하는 선한 싸움을 목숨이 다하기까지 싸운다고 했습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6~8).
사도 바울은 이 신령한 면류관을 최고의 낙으로 알기에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고 고백하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육신의 고난까지도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고난을 낙으로 여기는 믿음
바울은 일생 예수를 전하느라 수없이 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당한 고난을 구체적으로 고백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자기가 당하는 환난을 가벼운 것이라고 말하고, 이 환난으로 말미암아 장차 받을 영광은 실로 엄청나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6~18).
사도 바울은 자기가 이 땅에서 당하는 그 모진 고난을 낙으로 여길 만큼 신령한 낙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세상 쾌락을 추구하지 말고 영원한 영적인 낙을 사모하며 기뻐하는 영적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41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