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 있어도 최후까지 주님을 공경해야 경건한 것
사랑을 베푸는 자의 심정을 알아야 사랑의 의미도 알아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사람을 택하여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경건한 사람에게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다 주십니다.
베드로후서 1장 3절에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공경하여 바치고 드리고 충성하면서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아끼는 것 없이 다 주신다는 뜻입니다.
경건은 복을 담는 그릇
경건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큰 복을 받습니다. 이와 반대로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하는 까닭은 경건치 못해서입니다. 한마디로 경건은 하나님께서 주실 ‘복을 담는 그릇’과 같습니다.
욥을 생각해 보십시오. 친하게 지내던 스바 사람과 갈대아 사람이 강도로 돌변해 종들을 죽이고 재산을 일순간에 빼앗아 갔습니다.
또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자식을 열이나 한꺼번에 천재지변으로 잃었을 때 무슨 삶의 낙이 남았겠습니까? 세상 살 마음이 티끌만큼도 없었을 것입니다.
욥은 그 모든 재앙이 사단의 역사인 줄 알지 못했기에,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주실 땐 언제고 왜 빼앗아 가십니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온몸에 악창이 나서 재 가운데 앉아 기와 조각으로 온몸을 긁어 댈 때, 그의 아내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며 저주를 퍼부어도 하나님을 향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였습니다.
욥은 사람으로서 견딜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 닥쳐왔을지라도 하나님만 공경하며 믿고 신뢰했습니다. 그렇게 순전히 하나님을 공경하며 하나님을 향해 경건을 지켰기에 종국에는 갑절로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최후까지 주님을 공경하는 경건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하시려고 경건을 명령하셨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11절에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만큼 경건 속에서 복을 주시고, 택하시고, 만나 주시고, 모든 것을 진행하십니다.
경건에는 시기 질투가 없다
누가복음 15장 11절 이하에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탕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했기에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기 몫의 유업을 달라고 졸라 멀리 타국으로 갔다가 거반 굶어죽게 되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큰아들은 집에서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순종하고 살았으나, 아버지의 심정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제 동생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왔기에 기뻐하며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의 심정을 모르고 제게는 동무들과 즐겁게 놀도록 잔치 한 번 안 벌여 줬다고 아버지를 원망했습니다.
경건한 자는 절대로 원망하지 않고 질투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일은 자기도 좋습니다.
목사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말씀대로 행하며 사는 것을 성도들에게도 가르칩니다. 또 자기가 실패한 일, 성공한 일을 가르쳐 단점은 버리고 장점을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 처음부터 하나님의 힘에 의지하라고 기도를 가르칩니다. 이렇게 다 가르쳐 주는 것은 주님께서 주신 동일한 경험이 성도들에게 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실수나 어려움, 패배가 없기를 바라는 진실한 마음 때문입니다.
목사는 자기보다 성도들이 주님 사랑을 더 많이 받기를 원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사랑을 아무리 더 많이 받아도 질투하지 않습니다. 목사는 성도를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 낳았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자기보다 똑똑하다고 질투하는 부모를 봤습니까? “아들이 애비보다 똑똑하네”라고 하면 빈말이라도 좋아합니다. 자식이 아비보다 낫다는 데에는 시기, 질투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도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 이보다 큰 것도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12). 성도는 이런 목사의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경건한 사람은 사랑하는 자의 심정을 잘 압니다.
하나님을 인식하며 사는 것이 경건
예전에 어느 교회에서 집회를 마치고 나오는데 그 교회 목사님께서 사례비 봉투를 내밀며 “목사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우리 아버지 일하고 가는 것입니다”라고 말씀드리며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께서 “아니, 이번 성회에 우리 교회 일을 하셨으면서 왜 그러십니까?”라고 반문하시기에 그 이유를 충분히 설명해 드렸습니다.
“주의 일은 모두 우리 아버지의 일입니다. 우리 아버지 일을 했는데 왜 제가 사례를 받습니까? 제가 돈이 없습니까? 서울에 올라갈 차가 없습니까? 먹을 양식이 없습니까?”
그러자 그 목사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미안하죠”라고 하기에 “왜 목사님이 미안해 하십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일을 한 것뿐입니다. 목사님이 섬기는 하나님 아버지와 제가 섬기는 하나님 아버지가 다른 분입니까?”라고 제가 오히려 되물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형제가 서로 품삯을 주고받는 것보다는, 큰아들이 작은아들 집에 가서 일해 주고, 작은아들이 큰아들 집에 가서 일해 주어 서로 잘되게 하면 더욱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형제끼리 품삯을 주고받으면 노여워하실 것입니다.
저는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지 어떨지를 무척 많이 생각하는 편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마음을 편하고 기쁘시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경건은 매사 하나님을 온전히 인식하며 사는 태도와 마음가짐입니다. 성경에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84:10)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경건한 자이기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건이 넘쳐 나기를 바랍니다.<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420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