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가 전하는 디모데후서 3장 강해(61)]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으려면 경건하라

등록날짜 [ 2015-03-03 10:52:31 ]

설 곳을 잃은 사람은 충성의 대열에 끼지 못해
전도와 충성의 자리에서 절대 벗어나지 말아야


목사로서 성령의 감동에 따라 교회를 이끌어 갈 때, 교인들이 잘못한 일이 있다면 고쳐 줄 만한 것은 꾸짖어서라도 바로잡아 주려 합니다. 하지만 꾸짖을 가치조차 없는 일도 있습니다.

살아 있는 가지에는 열매가 안 열리면 관심을 갖지만 삭정이(살아 있는 나무에 붙어 있는 말라 죽은 가지)에는 열매가 안 열려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삭정이는 잘라 없애면 그만이지 열매가 안 열렸다고 투덜댈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가치 있는 자
교회에서도 삭정이 같은 교인들은 아무리 일을 저질러도 꾸짖거나 혼을 낼 가치조차 없습니다. 이처럼 아무런 가치를 요구받지 않는 자는 경건치 않은 자로서, 이미 하나님 앞에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치를 충분히 요구하는 자가 경건한 자입니다. 경건치 아니한 자들은 꾸짖을 가치가 없기에 노아 홍수처럼 물로 심판하고, 소돔과 고모라처럼 유황불로 심판하고, 최후에는 영원히 타는 지옥 불 못에 던져지고 맙니다. 마지막 때일수록 경건치 않은 자는 설 곳이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했고(시1:40), 야고보 사도도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신다”고 했습니다(약4:6).

교회에서 조그마한 문제가 생겼을 때나, 충성이나 전도하는 자리에 가기 싫다면, 그는 그만큼 설 곳을 잃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설 신령한 자리를 스스로 놓치고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그러다 교회를 떠나고 맙니다. 사람이 볼 때는 그가 속상하고 기분 나빠서 교회를 떠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설 곳이 없어서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착같이 충성하고, 전도하는 신령한 그 자리를 내 몫으로 여기고 절대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경건치 않은 자는 설 자리가 없다
누구든지 경건치 않으면 설 자리가 없습니다. 만약 목사가 불의를 저지르고 강단에 선다면, 교인 앞에 무슨 낯으로 설교하겠습니까? 경건치 못한 만큼 스스로 설 자리를 잃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경건한 사람은 자기 지경이 점점 넓어집니다.

베드로 전서 4장 18절에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않은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곧 죄인은 설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설 곳이 없으므로 구역장이나 기관장 직분을 맡아 일하다가도 조금만 기분 나쁘면 그만둬 버립니다. 이는 자기 스스로 그만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그 자리에 두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경건을 잃은 탓입니다. 경건하지 못하여 설 곳을 잃은 사람은 충성의 대열에 끼지 못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의를 행하는 자는 언제, 어디서나 담대합니다. 담대한 사람은 그만큼 설 곳이 많습니다. 죄를 범하면 사람 앞에 서는 순간 ‘누가 알면 어떡하나?’ 해서 두렵고 떨려 담대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목사가 돈을 많이 벌어 성도들 몰래 빌딩을 사 놓았다면, 성도들에게 “십일조 하세요, 감사예물 드리세요”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양심에 걸려서 못 합니다. 그만큼 목사로서 설 자리가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즉, 주의 종으로서 하나님 말씀을 대언할 담대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경건한 사람은 담대합니다. 당당합니다. 최고로 담대한 사람이 경건한 사람입니다.

 제가 성도들에게 찬양하기 전에 “기도합시다”, 예배드리기 전에 “기도합시다”, 무슨 일을 하기 전에 “기도부터 합시다”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회개해서 담대함을 가지자는 뜻입니다.

찬양대원에게 “한 시간 전에 와서 기도하고 찬양하라”고 말하는 것도 회개하여 거룩함을 얻어 그 경건의 힘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그런 경건한 찬양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십니다.

기도로 경건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담대함을 얻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경건치 못한 사람이 담대하다면, 이는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행위입니다.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
경건치 아니하는 자와 죄인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더 나아가 심판을 받아 하나님께 버림받습니다.

베드로 후서 3장 7절에도 보면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늘과 땅을 불사르려고 보존해 둔 이유가 그 안에 경건치 않은 자를 집어넣고 태우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경건치 않은 자는 쓰레기처럼 태워 버려지는 최후를 맞는다고 할 때, 우리 믿는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이 나옵니다.

우리는 시험에 들어서는 안 됩니다. 시험에 들었다는 말은 믿음의 뿌리가 썩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경건치 못하다는 의미요, 결국 설 자리를 잃고 뽑힌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하나님 앞에 경건해야 합니다. 경건치 못한 자가 최후에 지옥 불못에 던져지는 심판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머무는, 의로운 사람, 경건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구원하신 주님 은혜에 감사하며 평생 하나님을 공경하는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유다서 4절에도 동일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 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즉 경건치 아니한 자는 만세 전부터 심판하기로 하나님이 이미 판결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판결하신 일을 누가 번복하겠습니까? 용납할 여지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경건한 자가 되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공경해서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42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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