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5-03-10 15:19:27 ]
사랑은 주는 자와 받는 자의 마음이 통해야 하는 것
하나님 사랑을 받는 길은 오직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하나님은 인간을 살리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예수께서는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믿는 자마다 죄를 사해 주시고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실 계명과 말씀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해서 멸망하는 수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절대적인 사랑을 가지고 설득하고 깨닫게 하여 인간을 살려 주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무제한 열어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들어와 영생을 얻으라고 말해 주는 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을 살리고자 하는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전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는 충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가진 직분에 매여서, 체면에 매여서, 또는 자기 의를 나타내려고 억지로 충성한다면 하나님 앞에 별 가치가 없습니다. 만일 목회자가 영혼을 살리고자 하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이 없이 먹고살려고 목회하고 형식적으로 설교한다면 이것은 위로 하나님을 속이고 아래로 성도를 속이는 위선입니다.
또 자신을 무서운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자로 만들어 가는 소치입니다. 신앙생활 하는 모든 부분에 영혼을 향한 사랑이 빠져 있다면 그것은 생명 없는 허수아비일 뿐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삶은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전도와 충성이 위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요, 아래로는 이웃과 사랑하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 영혼이 예수 믿고 구원받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그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믿음 생활을 잘해서 하나님 나라에 갔을 때 큰 면류관을 얻을 것인가 하는, 오직 그 사람의 영육 간의 행복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빠진 신앙생활이라면 하나의 종교생활에 불과합니다.
병자에게 손을 얹고 기도할 때도 사랑 없이 의무적으로 기도한다면 어찌 능력이 나타나겠습니까? 고쳐 주고 싶어 하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고통당하는 병자와 심정이 통해야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해 주십니다.
사랑은 사랑을 주는 자와 받는 자의 마음이 통해야 합니다. 한쪽은 사랑을 주는데 다른 한쪽이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관계가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관계를 이루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우리 인간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살기에 가장 적합하고 아름다운 에덴동산을 만들어 그곳에서 아담과 하와 부부가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6~1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에덴동산의 질서요, 하나님과 아담의 질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아담이 먹어 에덴동산의 질서가 깨졌습니다. 하나님과 사이의 질서도 깨졌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길은 오직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탕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미리 받아서 집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이 떠난 순간부터 아들이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립니다. 집을 나간 아들은 창기와 더불어 재산을 탕진하고 주린 창자를 움켜쥐고 갈 곳이 없어 방황합니다. 그때 타국의 어떤 사람의 손에 이끌려 돼지 치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조차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눅15:15~16). 결국, 탕자는 깨닫습니다.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눅15:15~19).
탕자는 아버지를 볼 염치가 없습니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돌아옵니다. 이처럼 한번 파괴된 질서를 회복하는 데는 상당한 고생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도 자신이 살려면 인간적인 생각이나 체면을 포기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 저 사람하고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절대로 같이 일 못 해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을 무제한 용서해 주어서 원수로 삼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마18:21~22).
하늘에 떠 있는 해가 누구에게나 같이 비취듯이, 하나님의 사랑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역사합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을 가로막을 자가 없고 제한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아무리 대적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상상하지 못할 비인격적인 행동을 했을지라도 만약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여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사랑으로 받아들이십니다. <계속>
『제한 없는 열애』
윤석전 목사 著 / 연세말씀사
위 글은 교회신문 <425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