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5-05-26 12:48:09 ]
신앙생활은 주님께서 명하신 뜻대로 살아가는 것
말씀대로 사는 자에게 신령한 영력과 영감이 넘쳐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핍박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딤후3:10~11).
지난 호에는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삶 전체가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의 기억 속에 생생히 남는 ‘교훈’이 되길 원했다는 말씀을 나눴습니다. 이번 호에는 사도 바울이 하나님 앞에 어떤 믿음의 행실을 했는지에 대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나를 움직여가는 힘
‘행실(行實)’은 ‘실제로 드러나는 행동’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행실’은 어떤 사람의 생활과 행동을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행실을 지금까지 곁에서 지켜본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아보려면 말보다 행동을 보면 됩니다.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은 자기 말에 책임을 지지 않는 외식하는 자요, 이중인격자입니다.
‘행실’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움직이는 힘으로 나타나기에 처음 결심한 대로 실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말씀을 들어 은혜받을 때는 ‘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채 사흘도 못 갈 때가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에게는 하나님 뜻대로 행동할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하면 행동할 힘이 생깁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하나님 앞에 결단한 바를 드러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늘날 많은 사람이 성장하기 위해 상당히 많은 행동을 연구하지만 우리는 어떤 행실을 할지 연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주님이 감동하시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 까닭은 육신이 따라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하신 것도 육신이 따라 주지 않는 현실이 안타까워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의 행동이 처음 마음먹은 그대로 따라 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바울도 이 문제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던지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1~24).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사실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한다’는 것이 쉬운 듯해도 그렇게 순종할 힘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제자들과 초대교인들이 그렇게 열심히 전도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 뜻대로 살다가 순교했다는 것은 현대를 사는 우리는 상상도 못할 엄청난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게 한 유일한 방법은 성령 충만이었습니다. 이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의지를 가지고 기어이 목표까지 올라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의지가 약해서 중간에 포기합니다.
무엇인가 해 보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아예 자기는 ‘못하는 사람’이라고 단정 함으로써 자기를 도와줄 모든 힘을 놓치고 맙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 행실도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걸어가는 것이 누구에 의해서인가가 중요합니다. 우리 행실이 어떻게, 또 어떤 스케일로 어디까지 점령당하여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잠언서 8장 13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악한 행실을 미워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악한 행실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 들면 악한 행실을 좇아갑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주일에만 교회 가기로 했어. 주일에 하루만 교회에 열심히 나가면 됐지 뭐 그렇게 열심히 다녀?”라고 했다고 합시다. 주일에 한 번 교회 오는 것으로 마음을 정했으니 아무리 주일 저녁에 나오라고 권유해도 안 나옵니다.
자기 믿음을 그 수준으로 끝내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속에 자물쇠를 채워 놓아서 요지부동입니다.
하나님이 움직이는 사람
바울은 글을 쓸 때나 가르칠 때 언제나 ‘나는 이렇게 산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자신이 있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부러울 정도입니다.
자신의 실제 삶을 예로 들면서 그렇게 살아 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11:1)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기록한 서신서들을 보면 성령이 움직인 사람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부터 앞으로 나가면 나갔지 절대로 후퇴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주님에 대한 고백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점점 더 강하게 자신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1절에는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이라고 했지만, 빌립보서 1장 1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주님께 종으로 완전히 내놓은 것입니다. 종은 기본권을 박탈당하고 주인의 뜻에 의해서만 움직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처음보다 나중에 교만해지는데, 바울은 점점 더 주님께 압도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종’이라고 할 때는 주인의 뜻대로만 움직이는, 나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하나님만이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움직인 사람들의 행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명책에도 하나님이 움직인 사람, 하나님과 함께한 사람들의 행실이 기록될 것입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436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