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5-06-23 17:22:56 ]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를 보내신 뜻을 꺾지 않으셨듯
우리도 주를 향한 믿음과 소망을 영원히 변치 말아야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핍박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딤후3:10).
이번 호부터는 디모데후서 3장 1절부터 17절까지 말씀을 중심으로 사도 바울이 하나님 앞에 예수 몰라 지옥 갈 영혼 구원을 위해 어떤 ‘의향’을 갖고 전도자로서 최후에 순교하기까지 살아왔는지 살펴보고 우리 삶에 귀감으로 삼고자 합니다.
복음 전도, 영혼 구원을 위한 삶
바울이 디모데후서 3장 10절에 표현한 ‘의향(意向)’이라는 단어에는 무엇을 하려는 ‘생각’과 ‘목적’이라는 두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 몰라 지옥 갈 영혼을 살릴 구령의 열정을 가진 전도자로서 장차 자기 목숨을 복음 전도를 위한 순교의 제물로 내놓겠다는 의향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3~24).
이것이 바로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은 바울이 말한 성령에 이끌린바 된 삶의 의향입니다.
바울은 이것이 바로 자기를 사도로 삼으신 주님의 의향이요, 성령의 의향이요,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겼기에, 자기 목숨을 아낌없이 영혼 구원을 위해 내놓을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주님께서 현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 크리스천에게 바라고 기대하시는 ‘의향’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나를 죄와 저주와 사망과 지옥 형벌에서 건져 주시려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주님의 인류 사랑을 전하여,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받게 하는 일을 이루기 위해 죽도록 충성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증거하는 전도자들은 사는 것보다 죽기를 잘 해야 합니다. 우리는 천사도 부러워하는 일, 하나님께서 천지간에 아무에게도 맡기지 않고 오직 아들의 피를 쏟아 구원한 자기 자녀에게 영혼 구원하는 일을 맡기셨으니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살고 죽어야 합니다.
바울도 바로 이 영혼 구원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바울의 삶의 의향은 한 마디로 죄지어 지옥 가는 영혼에게 예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생애를 아낌없이 바치는 것입니다. 참 신령한 매력이 철철 넘칩니다.
바울은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모진 핍박을 당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현장에서도 이런 의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순교의 현장에서도 지옥 가는 수를 하나라도 줄여 보겠다는 구령의 열정으로 예수 복음을 전했다는 전승이 있습니다. 참으로 아들의 피를 흘려서라도 죄로 지옥 가는 인류의 영혼을 방관하지 않으시고 인간을 살리려 하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인물입니다.
목숨보다 더 큰 일을 위해서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예수 믿는 성도라고 불리면서도 교회에서 조금만 속이 상하거나 기분이 나쁘거나 언짢은 일이 생기면 당장 의기소침해집니다.
영원히 사는 생명을 얻는 신앙생활에 방해를 받고 맙니다.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일에 비하면 비교할 수조차 없는 너무나도 작은 일 때문에 자기가 나아갈 목표를 잃는 어리석은 행위를 하고 맙니다.
왜 그럴까요? 신앙생활의 목적(目的)이나 의향(意向)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바울처럼 나의 목숨을 어디에 쏟아부어 아낌없이 써야 할지 목적과 의향이 분명해야 합니다.
이런 분명한 목적, 확고한 의향만 갖고 있다면 어떤 환란이나 핍박이나 심지어 죽음이 닥쳐와도 감히 그를 넘어뜨릴 수 없고, 오직 감사함으로 넉넉히 이기고야 맙니다.
그러므로 어찌 보면 믿음 안에서 기쁘게 죽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내가 당하는 고통보다 더 큰 가치를 신앙 안에서 발견하면 죽음도 기쁜 것입니다.
죽음도 막을 수 없는 더 크고 영원한 가치가 있다면, 그것을 얻고자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는 말입니다. 매를 맞아도 살이 터져 짓뭉개지고 피가 낭자하게 흐르는 고통보다 영원히 큰 가치를 얻었다면, 죽음도 두렵지 않은 더 큰 유익이 있다면, 그것을 얻고자 기꺼이 목숨을 내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신앙 안에서 영원한 생명인 영생을 발견한 사람은 죽음보다 큰 가치가 확실하기에 자기 목숨을 영혼의 때에 영원한 영광과 자신만만하게 바꿀 수 있습니다.
믿노라 하는 사람들이 믿음 없는 사람을 볼 때, 몹시 안타까워합니다. “참, 저 영혼이 불쌍하다. 저 사람, 저렇게 죄만 짓고 살다가 지옥 가면 어떻게 하나?” 그런데 이런 말은 그저 지식에서 나오는 상투적인 감탄사에 불과합니다.
믿노라 하는 사람에게 정말 지옥 가는 사람의 참혹한 멸망의 문제를 해결해 줘야겠다는 주님 심정에서 나오는 강렬한 의향이 있다면, 안타까워하는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믿음 없는 이를 지옥에서 건지려는 적극적인 행동을 즉시 시작할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을 움직일 힘은 확실한 생각, 확실한 의향, 확실한 목적 속에서 나옵니다. 그렇게 확실하지 못하면 누가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귀한 목숨을 투자하겠습니까?
바울은 자기 생애를 복음 전하는 일에 모조리 투자했습니다. 골로새서에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지옥 가는 영혼 살리는 일에 온갖 고통과 고난을 받기로 작정하고 전도자로 출발했습니다.
바울은 무서운 고난을 철저하게 자기 몸으로 자청해서 받으려고 자기를 내놓은 사람입니다. 평범한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의 고난을 통해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면, 자기 몸에 기꺼이 고난을 채우겠다고 작정했습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439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