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가 전하는 디모데후서 3장 강해(77)] 하나님의 명령에 거역할 의향이 없어야

등록날짜 [ 2015-07-01 16:04:39 ]

평생 살면서 어떤 핍박과 고통에도 굴하지 않으며
영원한 목표를 향해 변치 말고 앞으로만 나아가야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

이것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밝힌 하나님의 의향(意向)입니다. 그 말씀을 들은 즉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의향에 동의해서 자기가 거주하던 하란 땅을 떠났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말씀을 들을 당시 아브라함으로서는 홀가분하게 떠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을 거역할 의향이 없었기에 기꺼이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의향에 무조건 동의하여 따르는 자가 바로 믿음의 사람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떠나라고 말씀하신 이가 모든 책임을 질 줄 믿고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난 것입니다.

신령한 고집이 있어야
한 나라의 대통령이 자기를 보좌할 비서실장을 세울 때, 자기 말에 거역할 의향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을 세울까요? 누구보다 앞서 대통령의 의향을 알고 대통령의 지시대로 수중들 사람을 선택합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지옥 갈 수많은 영혼 구원을 위해 불러다 쓰시는 사역자도 하나님이 명하시는 일에 거역할 의향이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우상숭배의 도시,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는 하나님의 의향을 확실히 알았기에 즉시 순종했습니다. 그로부터 수십 년 후, 독자를 바치라고 말씀하실 때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자니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래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의향을 따르겠다는 마음이 변치 않았기에 즉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나이 100세 얻은 독자를 번제로 바치라는 말씀을 거역할 의향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 살면서 어떤 핍박과 고통이 올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할 의향이 없어야 합니다. 사명에서 뒤로 물러설 의향이 없는, 의지 굳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믿어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변덕이나 떨고 쩨쩨하게 살면 어떤 일도 성공하지 못합니다. 지엽적인 면에 생각을 가두지 말고 확실한 과녁을 향해 요지부동 가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독자를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을 받은 때부터 사흘 길을 가 모리아 산에서 자식의 목을 치려 칼을 들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의향이 도무지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이 땅에 오실 인류의 구원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큰 자’로 일컬음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고집’이 있어야 합니다. 영혼의 때의 부유를 얻고자 하는 ‘신령한 고집’을 아무도 꺾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핍박도 능히 이기며
핍박을 받거나 무슨 문제가 생길 때, 그 사람의 근본 기질이 나타납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견뎌야 하나. 차라리 그만두는 게 낫겠구나’ 하고 순간에 포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쓰러질락 말락 하는 위태로운 상황인데도 악착같이 붙들고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후자에게는 결국 모질게 핍박하던 사람이 손을 들고 맙니다.

우리는 때로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핍박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에 마음을 돌이켜 예수를 믿어 구원 받고 믿음의 동역자가 되는 모습을 봅니다. 아무리 무섭게 핍박해도 전혀 꺾이지 않는 믿음의 절개 앞에 기가 질리고 도대체 무엇이 이처럼 강한 믿음을 주는지 알고 싶어 교회에 따라오다가 말씀을 듣고 결국 자기도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제일 힘든 사람이, 교회 가자고 할 때마다 핍박하기보다 순순히 받아들이기는 하면서도 “다음에 가겠다”고 미루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해볼 수 없습니다. 저는 성경을 통해 바울을 보면서 ‘참 주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는 사람이다.

주님 심정을 정확히 알아서 행하며 사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바울처럼 수많은 핍박을 받고도 끝까지 견디며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할 사람, 곧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뜻과 섭리와 의향을 확실히 가진 자를 주님이 언제나 쓰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여, 나를 크게 써주시옵소서’라고 해 놓고 나서도 조금만 무슨 일이 생기면 교회에 못 다니겠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크게 쓰겠습니까?

돌에 맞고 옥에 갇히고 매질을 당하고 갖은 고문과 박해를 당해도 하나님의 의향대로 지옥 갈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확실하게 수중들 줄로 믿었기에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나도 동의해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로 뜻을 정했다면 그 의향이 꺾여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내 뜻을 정해 놓고 내 의향대로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라고 명령을 내리셨는데도 그 일을 시행하기 어렵다고 핑계댑니다. 자기 의향대로 과녁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께 그 과녁대로 하자고 우겨댑니다. 하나님의 의향과 내 의향이 다를 때 문제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내 마음대로 과녁을 그려 놓고 활을 조준해 쏘지 말고, 하나님이 그려 놓은 과녁에다 활을 쏘아야 합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과녁에 맞췄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과녁에 맞췄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든지 내 요구에 주님이 응해 달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처럼 주님의 요구에 나도 같은 의향을 가져야 합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440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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