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5-07-08 01:36:41 ]
같은 뜻과 믿음으로 명령에 절대 순종하는 자 찾으시니
말세(末世)일수록 주를 향한 충성의 마음이 변치 않아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친구란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고 이해해 주며 항상 동행하고 죽음의 자리까지라도 변함없이 함께 갈 수 있는, 의향(意向)이 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백 세에 낳은 독자일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번제로 바치려 한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동을 보시고 크게 감동하셨습니다(창 22장) ‘너는 내 독자라도 죽여 죗값으로 지옥 갈 인류를 구원할 내 뜻에 함께할 수 있는 자로구나’라고 여기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자신과 ‘같은 의향’을 가지고 인류구원사역을 향해 ‘같이 갈’ 사람으로 인정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믿음의 큰 역사를 가슴에 품고
또 주님은 자기가 채찍에 맞아도 우리 인류는 그 공로로 질병에서 치료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런 주님을 향해 “주님, 저는 그 거룩한 의향에 철저히 동의합니다”라고 하면 병든 자가 나음을 입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매 맞았어요? 왜 맞으셨어요?” 한다면 주님이 매 맞으신 공로와 그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주님께서 “내가 너의 지옥 갈 죗값을 갚아 주려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었다” 할 때, “주님, 저는 죗값으로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인데 십자가에 못 박혀 내 대신 죽으시고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지옥에서 건져주신 주님과 공감대를 이루고, 그 피 공로로 구원받으려는 의향을 보일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주님과 의향이 같아야 합니다.
우리는 평생 살면서 주님과 인류구원의 의향을 함께 가져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의향이 맞지 않으면 당장 내쫓겨 가차 없이 버림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통해 믿음의 큰 역사를 일으키길 원하시는데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의향에 동의하지 않고 변질되고 배신하면 가차 없이 내버리십니다.
삼손, 사울, 히스기야가 변질해 하나님과 의향이 달라졌을 때 가차 없이 버렸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과 의향이 같아야 합니다.
또 주님의 의향을 따라가는 길에 주님과 함하는 고생을 불행이라고 보면 안 됩니다. 주님은 죄로 지옥 갈 나를 구원하시려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시는 고난을 당했는데, 우리가 고난받는 것이 그리 대수겠습니까?
주를 위해 당하는 고난은 불행이 아니고, 주님이 하늘에서 갚으실 면류관이라는 상급입니다.
기독교인이 주님과 더불어 죄로 지옥 갈 영혼 구원이라는 ‘같은 생각’ ‘같은 의향’ ‘같은 마음’ ‘같은 행동’ ‘같은 길’을 가면서 고난받는다면, 그 고난 때문에 반드시 하늘에 상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상을 주고자 하는 의향이시요, 우리도 자기 의를 이루고자 하는 뜻이니, 절대로 거룩한 의향을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예수의 정신으로 무장하여
바울이 전도여행을 떠날 때 처음에 마가를 데리고 갔습니다. 마가의 생각으로는 바울과 함께 전도여행을 떠나면 능력이 나타나고 병이 치료받는 대단한 역사가 일어날 테니 대접을 굉장히 받을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복음 전하다가 두들겨 맞고 옥에 갇히는 고난이 따르니까 도중에 그만두고 가 버렸습니다(행13:13). 마가는 전도여행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도 너희는 구원받아라’는 예수의 정신을 모르니까 중간에 포기하고 가 버리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죽어도 주님과 함께할 의향이 있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죽을지라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붙들려 고난당하시자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 버렸고, 수제자 베드로는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저주하고 맹세했습니다.
로는 누구나 주를 따를 의향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고난의 현장에 가 봐야 그 의향의 진실이 드러납니다.
우리 교인들도 정말 주님을 따를 의향이 있는지 마지막 때에 가 봐야 압니다. 말세가 닥쳐와서 믿는 자가 믿는 자를 서로 잡아 주고, 서로 죽이고, 서로 핍박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이단, 적그리스도, 거짓 선지자가 나타나서 믿는 자를 미혹할 때, 믿음의 본성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누가 알곡이고 누가 쭉정이인지 금세 가려집니다. 그때 쭉정이 근성이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도록 지금부터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수의 절대적인 사명으로 꽉 차 있어야 합니다.
주를 향한 충성이 넘쳐야
지금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시기에도,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일에 어려움이 있거나, 주의 일할 때 자기에게 손해가 오면 벌써 육의 생각이 떠오르면서 안색이 싹 변합니다.
이것이 육의 인간, 쭉정이 같은 인간입니다. 주를 위해 사는 일에 내게 어떠한 견딜 수 없는 고난이 닥쳐와도 ‘아, 나는 감당할 수 없으니 주님께서 해 주시겠구나. 큰 복이 왔구나!’ 하고 고난 뒤에 올 영광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서 주님을 향한 어떤 소망이나 뜻이나 믿음이나 충성이나 그를 향한 사랑이 손톱만큼도 상처받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주를 향한 사랑이, 주를 향한 뜻이, 주를 향해 충성하고자 하는 마음이, 기도하고 감사하고자 하는 마음이, 주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어떤 충격을 받아도 조금도 상처받지 않도록 확실한 믿음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만약 순교의 날이 불현듯 닥쳐온다면, 제일 앞장설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아마도 지금 막 예수의 십자가 보혈로 죄 사함받고 성령이 충만해진 사람들은 목숨을 내놓을 것입니다.
하지만 타성과 습관에 젖은 사람들은 적당히 타협하고 뒤로 물러날 것입니다. 겉으로만 신앙생활 할 뿐, 벌써 육에 젖은 사람들은 아예 순교 현장 근처에도 오지도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항상 현재를 보십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현재가 내 신앙의 최절정에 달해 있어야 합니다.
언제나 ‘지금’ ‘현재’여야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일수록 기도와 성령 충만이 중요합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441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