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5-09-09 14:07:20 ]
마지막 때일수록 이웃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 식어
복음 전도로 주님을 더 기쁘시게 하는 믿음 있어야
주님 재림의 날이 머지않은 이때, 우리는 삶의 초점을 믿음의 등불 들고 신랑 되신 주님을 맞이할 준비에 완전히 맞춰 살아야 합니다. 지금은 그만큼 재림이 임박한 시기입니다.
성경은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 말세에 기독교인이 얼마나 안일해지고 사랑이 식어지는지를 잘 말해 놓았습니다.
특히 데살로니가전서 5장 3절에서는,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잉태한 여인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르는 것 같이 주님의 재림이 순식간에 임할 테니 주님 맞을 준비를 하지 못한 자는 홀연히 임할 멸망을 피할 수 없다고 강력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지금 전 세계에 기근, 지진, 전쟁, 질병이 넘치고 있으며 사랑이 식어 이권(利權) 없이는 서로 용납과 타협을 하지 않습니다. 21세기 들어서 시대가 급변한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세상이 급변하는 만큼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함부로 살 때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24장에는 주님 재림의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자세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주님 재림하실 마지막 때를 주시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열심히 주님을 사랑하고 자기 영혼 사랑하고 이웃 영혼 사랑하여 한 영혼에게라도 더 복음을 전해서 구원받게 해야 합니다.
주님 사랑이라는 탈 쓴 인본주의 분별해야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땅만 봐도 날이 갈수록 주님 사랑이 식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날이 갈수록 주님이 무시당하고, 배척당하고, 멸시받고, 천대받고, 소외당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주님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믿노라 하면서도 병이 들었을 때 주님께 고쳐 달라고 믿음으로 주님을 먼저 찾는 것이 아니라 현대 의술에 매달립니다.
가정과 직장과 사업에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생겨도 주님께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방법을 총동원하여 해결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믿노라 하면서도 주님께 아무것도 구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전도하라는 말도 하지 않고, 또 전도하라고 해도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 일 년에 10퍼센트씩, 5퍼센트씩 교인이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충성하지 않아서 교회 청소를 용역회사에 맡겨야 할 만큼 교회 일을 돈 들여 사람을 사서 합니다.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셔서 피로 값 주고 산 성도들에게 주님께서 대접받기는커녕 이만큼 무시를 당하고 계십니다. 게다가 교회 일을 조금만 잘한다 싶으면, 머리 꼿꼿이 들고 교만을 떱니다.
“내가 교회에서 이만큼 일했으면 됐지 않느냐”는 식입니다. 주님이 성도에게 인정받지도 못하고, 대접받지도 못하고, 역사할 곳도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우리 교회는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을 모시고 있는 한, 주님 사랑, 내 영혼 사랑, 이웃 사랑이 절대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데 말세에는 이런 영적 사랑이 싸늘하게 식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말세에는 이기주의에 치우쳐서 영혼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주님 사랑 속에는 이기주의가 전혀 없는데, 믿노라 하는 사람들 속에서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인본주의, 박애주의가 주님 사랑이라는 탈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사랑이라는 탈을 쓴 박애주의, 인본주의를 분별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라”고 했습니다(요14:15).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길은 아버지 말씀에 순종해 아버지 사랑 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길은 주님이 공급하시는 능력으로 주님이 하신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면서 순종 가운데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주님을 사랑한다면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영혼을 섬기고 보살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 몰라 죄로 지옥 가는 영혼에게 전도하지 않고 지옥 가는 것을 뻔히 보고도 방관하면서 주님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어불성설입니다.
내게 맡긴 양떼를 사랑으로 섬기지 않고 주님을 사랑한다면 이도 어불성설입니다. 자신에게 맡긴 일을 충성스럽게 해내지 못하고 주님 사랑한다면 그것 또한 어불성설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게 살아야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해야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 나를 향해 심기가 불편하시면 쫓겨남을 당하고, 기쁘시게 해 드리면 주님의 즐거움에 참여할 것입니다.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주님 사랑이자, 자기 영혼 사랑입니다. 그런데 말세는 이런 사랑이 식는다는 것입니다.
행동하지 않은 것은 사랑 아냐
결혼 날짜를 잡아 놓고 시집갈 준비를 하는 여인이 살림살이를 마련할 때, 아무리 많이 준비해도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더 많이, 더 잘 준비해서 시집가고 싶습니다.
주님이 진짜 내 신랑이요, 소망이 하늘에 있고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시집갈 준비를 하는 여인처럼 주를 위해 사는 일에 조금도 아까운 것이 없습니다.
저 역시 주님을 위해 사는 일에 아까운 것이 없습니다. 제 몫은 모두 하늘나라 제 집에 갖다 두고 이 땅에서는 빈털터리로 삽니다. 사람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려고 노후대책을 하지 않느냐고 묻지만 신랑이 다 책임지실 것입니다.
말로만 사랑, 사랑한다고 해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주님께 확실하게 믿고 맡기고, 필요할 때 주님께 공급받을 만큼 주님을 사랑할 때 이 땅에서 빈털터리로 살더라도 걱정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신랑이라고 말하면서도, 내 소유를 몽땅 못 드린다면 어떻게 주님이 내 신랑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행동하지 않는 사랑은, 입으로 말하고 속으로 부정하는 이중인격입니다. 주님을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이 행동으로 나타나고, 믿음 안에서 행복을 누립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450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