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5-11-11 15:48:42 ]
주를 위해 사는 모든 일은 곧 내 영혼의 값진 상이니
힘들고 지치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소망 잃지 말아야
기독교 신앙은 고난으로 얼룩져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고난이란, 아무 잘못 없이 외부로부터 괴로움이 가해져 피부에 닿고 정신에 미치기까지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삶을 가리킵니다.
욥은 사단에게 고난을 받아 열 자녀와 전 재산을 잃고 건강마저 빼앗겨 온몸에 악창이 나서 기왓장으로 헌데를 벅벅 긁을 만큼 잔인한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런 고난 중에도 오히려 하나님을 더 크게 발견하고 더 뜨겁게 만나서 하나님과 관계를 끝까지 힘써서 아름답게 간직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고난 없는 작품이 없고 고난 없는 행복도 없습니다.
고난 속에 살다가는 인생
이스라엘 민족은 아브라함을 통로로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작정한 복을 수태하자, 시작부터 끝까지 고난의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행복’을 주는 위대한 장소인 가나안을 찾아 수없는 고난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갈대아 우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날 때부터 고난의 길이 시작됐습니다. 정처 없이 떠나는 고난의 길에는 정신적, 육체적 부담과 내일의 염려와 수없는 어려움이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 담대히 길을 나섰습니다.
아브라함의 고난을 시작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는 그 날까지 이스라엘 민족에겐 수난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자 인류의 구세주가 이 땅에 오신다는 약속이 아브라함 속에 수태(受胎)되었습니다. 복이 수태되면 출산할 때까지 고생합니다. 사람도 수태하면 출산할 때까지 고생합니다. 부모가 출산하면, 이제 그 자식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죽을 때까지 고생합니다. 어찌 보면 인간은 죽을 때까지 고생하려고 이 땅에 태어나는 것 같습니다.
이 땅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죽을 때까지 행복하기만 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자식을 낳으면 그 순간부터 자식 뒷바라지를 작정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니까 키우는 재미에 고생을 고생으로 생각지 않고, 돈 벌고 일하는 재미에 고생을 잊지, 만약 그런 재미마저 없다면 고생은 지긋지긋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수많은 고생에서 희로애락을 조절하며 살아갑니다.
고난으로 시작해 행복으로 끝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뜻 없는 고생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품고 아름다운 고생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기 전까지 애굽에서 엄청나게 고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번성해 그 수가 창대해지자 애굽 왕 바로는 자녀 생산을 막으려고 밤중까지 강도 높은 노역을 시켰습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기본권을 빼앗기는 고통을 당하며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 같은 생활을 이어 나갔습니다.
이후 하나님께서 모세를 사용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이끌어 냈지만, 자유를 얻은 그들의 눈에는 여전히 보이는 것마다 고생이요, 고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고난에 종지부를 찍고, 언제나 고난에서 행복의 문을 열어 주는 분이십니다. 고난에서 출발해서 행복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예수 믿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현대에 이르러 예수 믿노라 하는 사람들이 크게 오해하는 바가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잘된다’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라는 말은 잘못된 신앙에 근거합니다.
세상에서 살다가 예수 믿으면 문제가 더 많이 생깁니다. 편히 자던 새벽에 교회 가야 하고, 텔레비전 볼 시간에 예배드리러 교회 와서 앉아 있어야 하고, 잠잘 시간에 기도해야 하고, 놀러 갈 시간에 예배드려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육체적으로는 예수 믿기가 무척 고통스럽습니다. 예수를 꼭 믿어야 하는 영적인 이유를 알기 때문에 고난을 이기지, 사실 육체적으로 예수 안 믿는 사람과 비교해 보면 고생하는 차이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예수는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려고, 인간을 구원하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구원을 완성해 놓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소식을 알리고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고 전해야 합니다. “예수가 너를 살리려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었으니 넌 그 사실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라고 말해 줘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해 주려면 고난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기독교는 시작부터 고난으로 얼룩졌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 이렇게 힘들어서 예수 믿겠느냐?’고 묻습니다. 고난이 힘들다고 생각하면 예수 못 믿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닥친 고난을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즐거운 신앙생활을 위하여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고난을 기뻐할 수 있을까요?
보통 일꾼들이 하루 품삯을 10만 원 받는데, 어떤 사람은 100만 원을 받았다고 합시다. 이 사람은 일하는 내내 싱글벙글합니다. 똑같은 일을 하고도 남들보다 품값을 열 배나 더 받았으니까 말입니다. 같은 일을 해도 품삯이 많아야 즐겁습니다.
일할 때도 기분이 나야 잘합니다. 유익이 커야 기분이 납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고난을 당한다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엄청난 유익이 남습니다. 우리는 그 유익 때문에 고난을 감사로 견뎌 냅니다.
사도 바울도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고난을 받으려고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자기는 고난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고난은 기독교인들에게 닥치는 필수 요소입니다. 역대 이래에 예수 잘 믿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 치고 고난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고난당할 때 절대로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당연하다고 여겨야 합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458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