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5-12-10 00:40:38 ]
최악이 닥치더라도 장차 올 영광은 이와 비교할 수 없으니
어떤 고난에도 깨어지지 않는 믿음으로 끝까지 쓰임받아야
사도행전 9장 15절에 보면 바울을 가리켜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만난 후 임금과 각 족속 이방인과 이스라엘에 복음을 전하고 최후에는 순교하였습니다. 순교는 끝까지 예수를 말하다 죽는 것입니다. 바울이 순교했다는 말은 하나님이 택한 그릇으로서 끝까지 ‘깨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이행할 때 유리그릇이나 질그릇 같은 사람은 조금만 충격을 받고 부딪혀도 쉽게 깨지기 때문에 믿고 맡길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 역시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잘 알기 때문에 깨질까 두려워 고난에 발을 들여놓지 않습니다.
반면에 깨지지 않는 그릇 같은 사람은 고난에 자신을 내던집니다.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위협이 오고 죽을 뻔하고 최후에 목이 잘려도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바로 어떤 고난이 와도 굴하지 않도록 만들어진, ‘깨지지 않는 그릇’ 같은 사람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택한 그릇은 세상 임금과 부딪혀도, 유대인들과 부딪혀도, 이방인과 부딪혀도 깨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큰 그릇은 어디를 가도 절대 깨지지 않습니다.
고난의 큰 보상은 하나님이 주시는 상
저는 설교하기 전에 기운이 없고 배에 힘이 없어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정도로 힘들 때가 많습니다. 설교할 때도 갈비뼈 밑에서 바람이 새는 것처럼 느껴지면서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눈치채지 못합니다. 그런 온갖 증상을 무시하고 설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힘이 갑절로 들고 입에서는 열이 나기 시작합니다. 기계에 기름을 안 치고 돌리면 열이 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육신의 상태로 연일 계속 이어지는 사역을 감당할 때가 잦습니다. 이런 육체의 고통은 누가 줄까요? 다름 아닌 저 자신이 자원해서 당하는 고통입니다. 제 육신이 아무리 힘들고 피곤해도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해 주고 싶고, 성도들의 범사가 잘 되고 믿음 안에서 어떠한 역경이라도 이겨 내고 신앙생활에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육신이 고통스러워도 성도들이 설교를 듣고 은혜받는 모습을 보면 무척 감사하고 기쁩니다. 성도들이 은혜받는 때가 제게는 모든 피로가 회복되는 순간이요, 죽음까지도 불사하게 만드는 목회 열정을 공급해 주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저는 청년 때부터 세상에서 하고 싶은 일이 많았습니다. 목표를 정해 정상의 고지를 점령하고자 하는 의욕이 대단했습니다. 분명 그 일을 했다면 고난을 수없이 겪었을 테고, 성공하여 쾌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 고난을 받았다고 하여 하나님의 신령한 상이 있겠는가를 생각해 보면, 제가 목사가 된 것이 백 번, 천 번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위해 기도로 담대히 나아가라
사도 바울이 자기 권한과 신분, 대우받을 만한 수많은 권리를 포기하고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자청한 이유는 영원한 천국에서 받을 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제일 큰 고통은 동족인 유대인에게 핍박받는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기에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위험한 순간에 로마 시민이라는 권한을 사용했다면 고난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기 권한을 사용하지 않고 고난을 기꺼이 당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것이 자기에게는 선한 싸움이요, 달려갈 길이요, 믿음 경주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신앙생활을 하면서 복음 전도 때문에 어떤 역경과 문제가 온다고 해도 피하려 하지 말고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불 속에서 타 죽는 사람을 건지려면 불 속에 뛰어 들어가야 합니다. 심각한 화상을 입을 수 있고 죽을 수도 있지만, 죽어 가는 생명을 건지려고 뛰어들듯이 영혼 구원을 위한 고난이라면 요령을 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서 적당히 빠져나가거나, 하나님의 명령을 적당히 우물쭈물 넘어가려는 것이 요령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요령을 완전히 버리고 확실하게 복음 전도를 위한 고난의 삶을 기꺼이 살려고 해야 합니다.
복음을 위해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우리가 이 땅에서 신앙생활 할 기회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제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날은 호랑이같이 엄하셨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입니다. 평생 안 돌아가실 줄 알았던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이별의 슬픔과 더 효도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교차하면서 ‘아, 나도 저렇게 갈 날이 오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정신을 더 바짝 차리고 제 삶을 가다듬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어느 때인가 인생을 마치고 이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어차피 떠나갈 인생이라면 이 땅에 사는 동안 복음을 위한 고난을 육체에 채워 죽음 이후 천국에서 영원한 상급으로 보상받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삶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4절에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자기 육체를 고난을 채우는 그릇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에게 준 육신의 세월은 예수를 위해 살고, 복음을 위해서 살아 영원한 천국의 상을 받을 하나님이 주신 절호의 기회입니다. 따라서 주를 위한 삶은 무의미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얼마나 값진 일을 하는 것입니까? 이 일에 대한 성취감은 최후에 하나님 나라에서 상을 받을 때 절정을 이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육체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이 있을지라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장차 올 영광과 상은 현재 당하는 고난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기 때문입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46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