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6-03-17 17:00:25 ]
육신에 투자한 만큼 결국 속게 되는 것이니
세상에 매이지 말고 영원한 가치를 좇아야
얼마 전만 해도 금 한 돈에 20만 원 정도 갔는데 요즘은 18만 원에 거래된다고 합니다. 1970년대에는 금값이 지금보다 훨씬 쌌습니다. 당시 금 한 돈에 1500원 나갔는데, 쌀 한 가마니 값은 5400원이었으니 쌀보다 3분의 1가량 쌌지요. 요즘은 쌀 한 가마니 80kg 가격이 18만 원 하니까 금 한 돈과 쌀 한 가마니 값이 똑같은 셈입니다. 그때 비하면 금값은 3배 오르고, 쌀값은 3분의 1로 값어치가 떨어졌다는 얘기입니다. 시대에 따라 값이 오르내린다는 것은 그만큼 어떤 물건이든 시간과 환경에 따라 가치가 변한다는 의미입니다. 무슨 물건을 값비싸게 사 놓았는데 세월이 흘러 그 가격이 내려갔다면, 그만큼 세월에 속은 것이겠지요. 우리는 누구라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물건이든 그 값어치에 한번쯤 속게 마련입니다.
유행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동안은 머리에 염색하는 것이 예쁘게 보여 노랗고 빨갛게 물들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아무리 예쁘게 보이려고 별의별 짓 다 해도 알고 보면 그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소용없는 짓입니다. 최고로 예쁜 사람은 있는 그대로 스스로 만족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과도하게 치장하고 꾸미느라 들인 시간과 돈은 그만큼 속은 것입니다. 그렇게 정성들이느라고 시간 들이고 돈 들이면 결국 다 속고 사는 셈입니다.
인기리에 방영하는 유명 드라마도 마찬가지입니다. 드라마에 빠지면 잠깐은 기쁘고 흥분됩니다. 연속해서 보면 아주 아슬아슬하니 재미있습니다. 다 보고 나서도 계속 감동의 여운이 남고 기억에 맴돕니다. 또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런 시간은 알고 보면 다 속은 시간입니다. 내 영혼을 위해서는 전혀 도움이나 유익이 되지 않고 그저 낭비한 시간일 뿐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문화, 물질, 문명, 유행 등 모든 것이 나를 잔인하게 속이는데도, 한 번도 ‘왜 속이느냐?’고 대적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 날뛰면서 속고 있습니다. 아주 기쁘고 즐거워하면서 속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내버리는 그 시간이 육신으로 볼 때는 즐겁고 감동적인 시간이지만, 죽은 뒤 하늘에 가면 속은 삶, 내버린 삶, 정말로 거둘 것 없는 삶, 유익이 없는 삶일 뿐입니다. 인생을 뒤돌아볼 때, 그런 무익한 시간을 다 빼고 나면 내 영혼을 위해 유익 되게 산 날들이 불과 얼마나 될까요.
속이는 것들에 농락당하지 말라
우리가 평생 바르게 잘산다고 한 일이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처럼 자기 영혼을 지옥에 던져 넣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얼마나 분하고 억울하겠습니까.
예전에 우리 교회 중.고등부 학생들과 청년들에게 ‘진실한 친구란 누구냐’에 관해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진실한 친구가 어디 있느냐? 세상 친구는 다 나를 속이는 존재일 뿐이다”라고 말입니다. 예를 들어, 열심히 공부하던 한 아이가 친구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았습니다. “오늘 채팅하다가 남학생을 만나기로 했는데 나랑 같이 만나러 나가자”며 조릅니다. 채팅해서 만난 남자를 만나러 가면서 왜 멀쩡히 공부하고 있는 친구를 불러서 함께 갑니까? 그러자 전화를 받은 아이는 친구의 채팅 상대가 궁금해져서 공부하다 말고 책과 연필을 책상에 집어 던지고 뛰쳐나갑니다. 친구와 함께 그 남자를 만나서 카페에서 커피 마시고, 때론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며 흥에 겨운 대로 어울려 못된 짓하고 놀다가 밤늦게 집으로 돌아옵니다.
“너, 어디 갔다 이렇게 늦게 오니?” 부모가 물어보면 “친구 하고 놀다 왔어”라고 얼버무리고 자기 방으로 쏙 들어갑니다. 부모 속이고, 제 양심 속이고, 하나님을 속입니다. 못된 행동이 그렇게 좋아서 희희낙락댔던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볼 때는 이 세상 친구는 모두 나를 속이는 존재일 뿐입니다. 우리는 속이는 것들에게 농락당하면 안 됩니다. 속이는 세월에, 속이는 물질에, 속이는 친구에 절대 농락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세상과 환경이나 자신에 농락당하지 말고, 나를 속이지 않는 분은 주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최상의 가치를 위해 살라
저는 우리 아이들이 세상에서는 사회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못 될지라도 저와 제 아내의 믿음을 보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 확고하다면 그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 자식들이 부모가 사는 모습을 보면서 ‘믿음은 속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으면 합니다.
만약 자식을 훌륭하게 키워서 제가 행복하고 자식으로 영광을 누리고 행복해 보겠다고 했다면 저는 속은 것입니다. 부자가 이 세상 육신의 때에 아무리 호의호식하며 영광을 누렸어도 영혼의 때를 준비하지 않았기에 음부의 불꽃 속에서 절규하며 몸부림쳤고, 그 부자의 집 문전에서 얻어먹던 거지 나사로는 영혼의 때를 준비했기에 낙원에서 영원히 행복했다고 성경에 극명한 대조를 이뤄 말해 놓았습니다. 영혼의 때의 진실한 행복은 우리 육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진실한 행복은 믿음으로 내 안에 이루어진 기업입니다. 이것은 속이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부모가 자식을 잘 가르치고 싶지 않겠습니까? 잘 가르쳐서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 봤자 지난날을 뒤돌아보면 예수 믿고 영적생활 한 것과 비교할 때 큰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됐다면, 영적으로 볼 때는 잘된 만큼 속은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가 보면 세상에서 잘된 만큼 속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세상일에 잘되려고 돈, 정신, 생애를 다 투자하다 보니, 그것이 내 영혼의 때에 가서 과연 얼마나 큰 가치가 있겠습니까? 내가 받을 영광의 면류관과 같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바로 이 땅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아무도 나를 속일 수 없는 최고로 가치 있는 삶입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47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