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6-05-09 11:43:31 ]
*주제: 믿음
*찬송: 199장 ‘주 십자가를 지심으로’
*본문: 누가복음 7장 11~17절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쌔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본문에 등장하는 나인 성의 과부는 인생에서 두 번이나 큰 고통과 절망을 맞이한 기구한 운명을 지닌 여인입니다.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고 이제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 죽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아들의 상여를 뒤따르며 통곡하는 과부의 모습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녀의 애절한 통곡과 눈물이 주님의 관심을 끌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즉시 상여를 멈추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어느 누가 북망산을 향해 가는 상여를 멈출 수 있습니까? 주님이 그 상여에 손을 얹으시고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자 놀랍게도 죽었던 청년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예수께서는 죽음을 향한 절망의 길을 순식간에 생명과 희망의 길로 바꾸셨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께서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 당하게 된 영원한 죽음의 행렬을 멈추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복음이란, 절망을 능히 해결해 줄 예수를 만나게 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 만남은 예수를 따르던 허다한 무리처럼 구경꾼으로서가 아니라 상여를 붙들고 통곡하던 여인과 같이 예수의 관심을 끄는 주인공으로서 만남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또 다른 죽음의 사건이 나옵니다. 평소에 사랑하시던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께서는 지금 베다니로 가고 있습니다. 모두 예수께서 그저 유대인의 관례상 조문하기 위해 가시는 줄 알았습니다. 도착해 보니 그 누이 마르다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주님께서는 비통히 여기시고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을 옮기라고 하셨습니다. 무덤 문이 열리자 죽은 지 나흘이 넘은 송장에서 썩은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늘을 향해 기도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놀랍게도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 걸어 나왔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요 11:43~44).
주님의 목소리 앞에는 어떤 불가능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인 성 과부의 아들과 나사로를 살리신 그 예수께서 나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불가능이 없으신 주님을 성령으로 내 안에 모시고 있으니 그분을 나의 불가능한 문제에 일하시게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불가능한 절망적인 문제와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주시려고 계속해서 나를 설득하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그 소리를 믿음으로 듣지 못하고 포기하고 있습니까?
“청년아, 일어나라!”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외치시는 주님의 애절한 목소리는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이나 나사로의 썩은 송장에게만 한 소리가 아니라 바로 지금 나에게 외치는 소리입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나의 불행을 종결시키는 절대 권세 있는 목소리로 들어야 합니다. 지금 당장 나에게 일하시는 현재성 있는 목소리로 듣고 불가능의 문제를 해결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 기도: 주여, 나의 불가능을 예수 그리스도로 해결할 수 있는 믿음을 주세요. 죽은 자를 살리신 그 능력과 권세가 넘치는 목소리가 나에게 들리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누구나 함께하는 예배』
윤석전 목사 저
위 글은 교회신문 <479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