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가 전하는 디모데후서 3장 강해 ‘마지막 때는 이러하니’(127)] 하나님의 의에 사람의 의를 섞지 마라

등록날짜 [ 2016-08-04 22:09:59 ]

세상 풍속과 사람이 만든 규범으로 말씀을 판단치 말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지혜 있어야

 

마지막 때에 분별치 못해 ‘하나님의 의(義)’인 줄 알고 잘못 좇았다가 멸망의 길로 갔다면, 이보다 억울하고 불행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이 ‘의(義)’인지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의(義)’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으로서 지키고 행해야 할 바른 도리’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과 관계에서 지키고 행하여야 할 바른 도리’, 즉 ‘하나님 말씀을 지켜 올바르게 사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의’다

하나님 말씀인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살았던 바리새인은 스스로 의롭게 여겼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613개 조항과 구전(口傳)으로 내려오는 전통적인 규범, 곧 장로들의 유전(遺傳) 역시 사소한 것이라도 일상생활에서 엄격히 지켰습니다. 예수께서도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준수하는 정신을 인정하시고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으니 당시 바리새인의 의는 실로 대단했습니다(마5:20).

 

문제는 바리새인이 하나님의 의보다 사람의 의를 앞세웠다는 점입니다. 그러다 보니 부모를 공경할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면서 고의로 부모 공경의 율법을 폐하기도 하고(마15:3~6), 기도할 때도 율법을 잘 지킨 사실을 드러내는 외식(外飾)을 범했습니다(눅18:11). 예수께서는 이런 바리새인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겉으로는 율법을 준수하는 의로운 사람처럼 보이나 그 내면에는 가증하고 더러운 죄악이 가득하다고 밝히 말씀하셨습니다(마23:27).

 

바리새인은 자신들을 적나라하게 지적하는 예수의 말씀에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분개하였고 어떻게 하면 예수를 죽일까 모의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 뒤 바리새인들은, 나사렛 목수의 아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하는 신성 모독 죄를 범했다 하여 예수를 잡아다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했습니다. 바리새인 자신들은 하나님 말씀을 철저히 지키는 자로서 하나님을 완벽히 섬긴 줄 알았지만, 결국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무서운 죄를 범하고 만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아무에게도 없습니다(롬3:20). 의(義)의 기준은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사람이 의를 얻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고, 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곧 ‘의’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의를 보존하라

하나님 말씀을 따르노라 하는 교회 안에도 세상 풍속을 끌어들여 하나님의 의를 퇴색시키는 행위를 종종 목격합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의와 사람의 의가 섞이고, 차츰 사람들의 의가 하나님의 의보다 높아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성도들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충성하고 수고했다 하여 교회에서 감사패나 공로패를 줍니다. 이것은 태양빛같이 밝은 하나님의 의(義) 앞에 반딧불같이 미미한 사람의 의(義)를 드러내는 꼴이 되고 맙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그가 교회 앞에 큰일을 했으니 당연히 치하하여 예를 표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누가 그에게 충성하도록 감동했고, 누가 충성할 건강과 환경을 베풀어 주었고, 누가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기까지 그의 죄를 사해 구원받게 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모든 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교회 앞에 한 모든 충성은 예수의 십자가 피 공로에서 출발했다는 ‘하나님의 의(義)’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것은 자기 의에 빠지고 결국 죄가 되고 맙니다.

 

또 고난 주간에 무심코 행하는 일들을 예로 들어봅시다. 고난 주간이 돌아오면 많은 성도가 예수의 고난을 조금이라도 경험해 보려고 금식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금식은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께서 받으신 고난은, 죄 없는 분이 죄의 누명을 짊어진 영적인 고난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자기 육체에 채우기를 원하여 목숨 다하기까지 복음을 전했던 것처럼, 예수 고난의 의미를 바로 알아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복음을 위해 그 고난을 채워야 합니다(골1:24).
 

세상 풍속에 하나님 의를 섞지 마라

부활절 역시 부활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지나갈 때가 많습니다. 부활절이 되면 달걀을 삶아서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교회가 있습니다. 거기에 무슨 부활의 의미가 담겨 있겠습니까. 예수는 근본 하나님이신 분이 인간의 죄를 사해 주려고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실제로 죽으셨고,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인 증거로 삼 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삶은 달걀을 나눠 준다고 해서 생명의 부활을 조금이라도 느껴 볼 수 있습니까. 어불성설이지요. 삶은 달걀이 예수의 부활을 상징한다고 하지만, 결국 사람의 방법으로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탄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성탄절이 돌아오면 교회에도 산타클로스와 루돌프 사슴이 등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봉사하러 오신 박애주의 정도로 오해합니다. 이것은 예수의 의와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지옥 갈 우리의 죗값을 대신 갚으시기 위해 근본 하나님이신 분이 죽으시러 고의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탄절에 예수가 오신 목적을 세상에 바로 알려서 죄로 지옥 가는 수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어 구원받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세상 풍속을 교회에 가져와 하나님의 의(義)에 섞은 뒤 그것이 옳은 줄로 오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의 의가 하나님의 의인 것처럼 포장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490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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