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6-08-30 01:45:32 ]
성경은 말세를 만난 성도에게 큰 유익을 주나니
선한 일을 행하며 기도로 성령 충만을 유지해야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이르기를, 말세에는 심한 고통과 미혹을 받아 한 치 앞도 분별할 수 없을 때가 온다고 했습니다(딤후 3장). 그러므로 말세에 감당하지 못할 일들이 닥쳐올지라도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7).
성경만이 ‘하나님 사람’으로 온전케 하여 말세에 선한 일을 온전히 행하며 견딜 수 있다고 강권합니다.
완전하신 하나님 말씀
‘온전(穩全)’과 ‘완전(完全)’은 의미가 다릅니다.
예를 들어, ‘온전(穩全)’은 시계를 제작했을 때 제작자의 생각과 취향에 맞게 흠 없이 만들어져 제대로 작동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제작 목적에 따른 실용가치를 확신할 때 ‘온전하다’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온전하게 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쓰시기에 좋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그런데 시계는 아무리 온전해도 어느 땐가 고장 나서 쓸모없게 됩니다. 이처럼 ‘온전’은 피조물, 창조물, 창작물 따위에 붙이는 말입니다.
이와 달리 ‘완전(完全)’이라는 말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만 붙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 완전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영원히 완전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완전하고 영원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죄로 멸망할 인간에게 ‘완전한’ 사랑을 나타내시려고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인간의 죗값을 ‘완전히’ 갚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에게 하신 약속을 ‘완전히’ 이루십니다.
성경 말씀으로 사람을 교육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으로 하는 교육’과 ‘세상 지식으로 하는 교육’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성경 말씀으로 교육해 온전해진 사람은 생명을 얻어 영생(永生)에 이릅니다. 세상 지식으로 교육해 온전케 하면 윤리 도덕으로는 흠 없는 사람이 되나 영생은 없습니다.
이처럼 성경으로 온전함과 세상 지식으로 온전함은 영혼의 때에는 극과 극의 차이로 귀결됩니다. 따라서 이 지구에서 사람을 영생에 이르도록 온전하게 하는 방법은 하나님 말씀인 성경으로 교육하는 길뿐입니다.
온전케 하시는 주 예수를 바라보라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있으라” 하여 창조하셨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성경은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온전히’ 창조됐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섯째 날에 사람을 창조하시고 천하를 다스릴 권세를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그날 하나님께서 우주 안에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창조를 마치고 보니 하나님 뜻대로 모두 ‘온전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마귀에게 속아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 명하신 선악과를 먹고 마침내 불의를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온전한’ 원형은 간곳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生靈)이 된 인간은 사망할 운명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면 온전치 못하게 됩니다.
마지막 때는 세상에 죄악이 꽉 차서 모두 온전치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죄악으로 꽉 찬 세상에 사는 우리를 온전케 하시려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히12:2).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인류의 죗값을 대신 담당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을 의지하여 회개로 죄를 철저히 씻어야 합니다. 그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시던 창조된 원형으로 돌아갑니다. ‘온전해졌다’는 말입니다.
성령 충만해야 온전할 수 있어
베드로는 가야바의 뜰에서 고난당하시던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마26:69~75).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죽을지언정 주님을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말입니다(마26:35). 베드로는 목숨에 위협을 느끼자 주님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죽을지언정 주님을 따라야 온전합니다. 죽음 앞에 비겁하게 도망친 베드로는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기도 전에 이미 베드로와 제자들은 다 도망쳤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처럼 자기를 배반한 제자들을 여러 차례 만나 주셨습니다. 승천하시기 전 감람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500명 넘는 사람이 그 말씀을 들었으나 120명만 마가 다락방에 가서 기도에 힘썼습니다. 나머지는 자기들도 붙잡히면 예수처럼 신성모독죄로 십자가형을 당할까 두려워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마가 다락방에서 기도에 힘쓴 제자들에게는 성령이 충만히 임했습니다. 제자들은 성령의 권능을 받아 땅끝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그들에게 온전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이 내게 이루어질 때’ 비로소 온전해집니다.
말씀대로 살려 하면 육신의 소욕과 세상이 어김없이 훼방합니다. 말씀에서 벗어나 온전치 못하게 하려 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어떻게 방해해도 끝까지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복받을 날을 바라보면서 말입니다. 복 받기를 원한다면 하나님 말씀으로 온전해져야 합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494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