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7-09-12 15:16:23 ]
예수님의 한없는 은혜는 생각하지만
절대 실권 가진 왕이라는 인식 없이 신앙생활 하는 사람 많아
왕의 면전 앞에 있는 신하처럼 그분의 권세 인정하는 영적생활 해야
왕을 아는 자
옛날에는 임금이 잠행(潛行)을 다니며 백성의 생활을 살펴보았습니다. 다음은 그때에 있었을 법한 이야기입니다.
왕이 평민처럼 옷을 입고 시골길을 걸어갑니다. 신하도 똑같이 평민처럼 옷을 입고 왕을 뒤따라갑니다. 왕이 논에서 일하는 농부를 보고 “여보게, 밥 한 술 주게” 하자 농부가 “이리 와서 같이 식사하세”라며 논두렁에 앉아 같이 식사를 합니다. 농부는 왕인 줄도 모르고 주거니 받거니 편안하게 말합니다. “어디서 오는가? 나이가 몇인가?” 하며 대화가 오고 갑니다. 신하는 그 모습을 보고 곁에서 벌벌 떱니다. 가슴이 조마조마합니다.
그러나 농부는 편합니다. 농부는 자기와 함께 식사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기에 지나가다 밥 한 그릇 얻어먹는 사람에게 말하듯 대화합니다.
“이 사람아. 자네는 상놈 같지는 않은데 어떻게 상놈으로 태어났나?”
신하들이 도저히 보다 못해 “왕이여, 저희가 보고 있기 민망합니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농부는 “왕? 왕이라고? 아이고, 죽여 주시옵소서” 하며 엎드려 벌벌 떱니다. 농부가 왕임을 알게 되는 순간 왕의 권위가 드러나고 농부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왕에게 함부로 상놈이라 했으니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이 문제가 비단 왕을 몰라본 농부의 이야기만은 아닌 듯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담당하려고 십자가에 달려 대신 죽기 위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구원하려고 종의 형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기까지 낮아지셨다고 할 때(빌2:6~8), 그분 앞에 우리의 자세가 얼마나 겸손해야 할까요?
그러나 우리는 자기 면전에 있는 왕을 미처 알아보지 못한 농부처럼,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만 기억할 뿐 예수께서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모든 만물을 주관하시는 만왕의 왕이라는 사실을 종종 망각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온전히 알고 이해하려면 왕이신 그분의 성품을 반드시 알아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무조건적인 은혜만 생각하지 말고, 그분이 왕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아울러 왕이신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바로 알고 그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영적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분은 왕이라는 신분만으로도 위엄이 충만하신데 죄인처럼 와서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으니, 그 은혜를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우리는 대충 신앙생활 할 수 없습니다. 예물을 드려도 적당히 드릴 수 없고, 충성을 해도 도중에 그만둘 수 없고, 예배를 드려도 외식과 형식으로 할 수 없습니다. 하늘 영광을 버리고 나를 위해 죽으신 왕을 위해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영적생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를 살리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왕을 바로 알고 그 왕의 뜻대로 행하여 조금이나마 그 사랑에 보답해야 합니다.
왕을 인정하는 절대적 믿음
우리는 왕과의 관계에서 왕을 수행하는 수행원의 위치에 있습니까, 아니면 왕을 그저 구경만 하는 허다한 무리에 속해 있습니까? 수행원은 왕을 절대적으로 인정하기에 왕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왕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상당히 주시합니다. 그들은 왕의 심정을 미리 헤아리고 왕의 다음 움직임까지 예상해서 수종듭니다.
마찬가지로 왕이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만족하시도록 수종들려고 하나님의 심정을 알려고 노력합니다. 그리하여 왕이 오른쪽으로 가자면 나도 우로 가고, 왕이 왼쪽으로 가자면 나도 좌로 갑니다.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해도 “왜 저한테 그런 것을 요구하세요?” 하며 거역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성령의 감동이 무엇이든 거역하지 않고 순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어려운 환난과 핍박과 역경을 견디고 육신의 소욕을 절제하고 성령의 뜻대로 사는 것이 왕을 인정하는 자의 삶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 왕조 시대의 신하들처럼 왕을 인정하는 절대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영적생활을 해야 합니다. 신하는 왕이 필요할 때마다 달려가려고 대기합니다. 왕이 부르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신이 하던 모든 일을 중단하고 왕에게 달려갑니다. 왜 불렀는지를 묻거나 따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황공하다면서 자기를 불러 준 것에 감사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 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불러 주셨다는 데 감사하고 황공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오히려 “무슨 예배 시간이 이렇게 길어? 빨리 좀 끝났으면 좋겠네” 하고 불평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은 왕이신 하나님을 자신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 성도 중에 공영방송 앵커로 있다가 중국에 특파원으로 간 사람이 있습니다. 그 성도는 새벽 방송이 있을 때는 그 시간을 지키려고 자명종을 4개, 5개씩 맞추어 놓는다고 합니다. 혹시라도 자명종 소리를 듣지 못해서 못 일어날까 봐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번도 방송 시간을 어긴 일이 없다고 합니다.
방송국의 업무도 시간을 어기지 않으려고 자명종을 4~5개씩 맞춰 놓는데,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왕 앞에서 우리는 어떤 자세로 영적생활을 해야 하겠습니까? 왕을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왕의 뜻대로 행하는 영적생활이 포기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정확하게 시간을 지켜야 하는 공영방송의 생방송 앵커나 한 나라의 왕이 부를 때 자신이 하던 일을 모두 제쳐 두고 달려가는 신하와는 그 수준을 비교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왕을 인정하는 자의 영적생활입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543호> 기사입니다.